스니커즈와 운동화
예전 다니던 회사에서 근무복장 자율화를 하면서 몇 가지 제한 규정을 공포한 바 있습니다. 찢어진 청바지나 칼라가 없는 T셔츠 같은 것은 불허라는 조항과 함께 가장 논란을 키웠던 것이 스니커즈는 허용, 운동화는 금지라는 항목이었습니다. 대부분 직원들이 이 항목을 받아들이기로는 가죽은 허용, 직물은 불허 또는 단색은 허용, 다양한 색은 불허 같은 자의적 해석이 난무했습니다. 조금 보수적으로는 이 두 가지를 교집합으로 하는 단색 가죽은 허용, 직물이나 다색은 불허라는 해석이 있었습니다.
직원 중에 실험정신이 강하고, 약간 미꾸라지 같은 스타일의 직원이 있었는데, 이 직원은 인사/총부 부서에서 과연 어디까지 이 규정을 해석할 것인가를 시험해 보겠다는 생각에 매일 다양한 종류의 신발을 착용하고 출근하면서 어떤 신발은 지적받고, 어떤 신발은 지적받지 않는지 관용도를 점검했습니다. 이 직원이 이렇게 다양한 신발을 시험할 수 있었던 것은 취미가 신발 수집에 당시 유행하던 운동화 리세일 재테크도 하던 친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이 스니커즈와 운동화의 경계 논란은 비즈니스 캐주얼에 걸맞은 신발의 추천에도 적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직장에서도 그룹에서 직원은 사실상 단정한 모든 복장과 신발로 규제를 대폭 풀었던 반면에 임원은 완화된(?) 비즈니스 캐주얼에 스니커즈로 제한했고, 이때 스니커즈는 단색 가죽 운동화 정도를 의미했습니다. 물론 명시적으로 규정은 안되어 있어도 단색이라고 빨강이나 노랑은 아니었지만 말이죠. 이 경우에도 단색에 브랜드 로고가 해당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는 있었습니다. 아디다스의 3선이나 나이키의 날개를 단색으로 인정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였죠. 대충의 컨센서스는 나이키의 거대한 로고는 좀 그렇고 아디다스의 3선은 인정하자 정도의 분위기였습니다. 아마 이것은 나이키 대비 아디다스의 삼바나 가젤 같은 운동화가 더 포멀 한 느낌이었던 것도 한몫했던 것 같습니다.

스니커즈(sneakers)의 정의
Sneakers (US) or trainers (UK), also known by a wide variety of other names, are shoes primarily designed for sports or other forms of physical exercise, but are also widely used for everyday casual wear.
위는 영문판 위키피디아의 정의인데, 이 정의에 의하면 윗글의 맥락에서 말하는 스니커즈와 운동화를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이름의 기원에서 알 수 있듯, 고무 밑창을 달아 소리 없이 잠입(sneak)이 가능한 신발을 의미한다고 보면, 운동화와 스니커즈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되기는 합니다. 가죽이라는 재질에 천착하게 되면 스니커즈의 대표라고 이야기하는 컨버스류의 신발은 제외해야 되니 꼭 가죽이라는 것이 중요한 요소만도 아닙니다. 결국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운동적인 기능보다는 패션에 중점을 둔, 하지만 로고 이외에는 단색을 기본으로 하면서 바닥이 평평한 고무나 합성수지를 이용한 신발 정도가 흔히 이야기하는 스니커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 제가 굵게 표시한 부분이 중요한 것이지요.
스니커즈와 정장
한때 슈트에 스니커즈를 신는 것이 뭔가 패셔너블하다는 이야기들이 회자되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전회사에서 그룹차원의 자율복장이 시행되었을 때 영 피프티가 되고 싶은 임원들이 스니커즈를 신으면서 자신이 패셔너블하다고 주장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슈트와 스니커즈가 정말 잘 어울리고, 패셔너블하게 보이는지는 따져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포멀 한 슈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3피스 슈트나, 바지통이 넓은 슈트, 브레이크가 걸리는 바지, 더블브레스트 슈트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옷과 스니커즈를 매칭하면 오히려 패션 센스가 있다기보다는 아재 느낌이 강하게 날 것입니다. 이런 복장에는 로퍼나 더비조차 디자인에 따라서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슈트라면 바지가 테이퍼드 핏으로 되고 가능하면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거나 걸려도 살짝 걸리는 정도로 기장이 수선된 경우에만 스니커즈를 신는 것이 좋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능하면 슈트에는 스니커즈를 신지 말 것을 추천합니다.
세퍼레이트로 입는 경우에도 바지 핏이 가장 중요합니다. 역시 테이퍼드 핏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경우가 좋고, 세퍼레이트로 입는 경우에는 센스 있게 스니커즈를 매치한다면 스타일리시하게 보일 수는 있겠습니다만, 저는 세퍼레이트로 입는 경우에도 로퍼나 캐주얼한 느낌의 구두선에서 신발을 조화시키는 것이 훨씬 쉽고,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비즈니스 캐주얼로 넘어가 바지를 울원단이 아닌 치노 바지나 다른 스타일의 캐주얼 바지로 변경한 경우에는 과하지 않은 디자인의 스니커즈를 신어서 패셔너블하게 보일 수는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캐주얼한 구두가 더 좋다는 생각이지만, 스니커즈도 나쁘지 않고 분위기에 따라서는 좀 더 느슨한 느낌으로 TPO에 맞출 수 있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스니커즈는 재킷-상-하의를 맞춰 입고서 그에 맞는 신발을 고를 때보다는 상-하의- 스니커즈를 맞춰 신고서 재킷을 슬쩍 걸친다는 느낌의 복장일 때 더 어울리는 신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탑-다운으로 코디를 할 때가 아닌 바텀-업으로 코디를 할 때 더 어울리는 것이 스니커즈죠.
재킷을 입지 않는다면 어지간하면 스니커즈가 어울릴 듯한데, 예외라면 어떤 신발로도 커버할 수 없는 근본을 알 수 없는 폴로 스타일 셔츠에 슈트에서 떼어낸 듯한 바지를 매칭한 아재스타일 코디라 하겠습니다. 이런 스타일은 신발의 매칭이 문제가 아니고, 그냥 입지를 마세요.

드레스업 추세 속의 스니커즈
스니커즈의 광풍이라 할 정도의 열풍이 어느 정도 물러가고, 고프코어 같은 룩에서 드레스업을 지향하는 추세로 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스니커즈 열풍도 이제는 한물갔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평생을 살면서 운동할 때 외에는 스포츠웨어를 입어본 적이 없고, 등산할 때 외어는 아웃도어 의류를 입어본 적이 없어서 요즘 부당하게 희화되는 영포티나 나아가 영피프티의 스타일과는 전혀 인연은 없습니다만, 제가 아디다스의 삼바를 신는 시대니 지표상으로는 스니커즈의 끝물은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달리해서 본다면 오히려 스니커즈 패션의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우선 무작정 유행 따라 살면서 교복처럼 옷을 입는 것은 트렌디하거나 스타일이 있는 옷차람이 아니라 개성 없이 남들 눈치 보며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니, 남들 드레스업 해서 스니커즈를 버릴 때 스니커즈를 맛깔나게 착용만 한다면 오히려 개성 있고, 스타일감 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취향과 개성이 있는 사람이 아닌 단지 유행에 뒤처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아이템과 코디가 좋아야겠지요.
아울러 스니커즈의 광풍이 사그라들면, 구하기 힘들던 제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아디다스 삼바가 소위 진리 취급을 당하던 시절에는 구할 수도 없었고, 웃돈을 주고 구해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유행이 지나가면서는 의외로 구하기 쉽고 때로는 할인가도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유행보다는 취향이 중요합니다. 유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한 갈래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단순히 유행을 따라가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취향을 확고히 한 뒤, 그 취향에 다양한 유행의 변주 중에서 적절한 유행을 골라 곁들이는 것만으로도 스타일 있게 보일 수 있습니다. (사실, 언젠가 깊이 있는 글을 쓰고 싶은 주제가 취향에 대한 것입니다. 제발 많은 사람들이 취향을 찾아 지키며 살아 준다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한집건너 탕후루집이 생겼다가 몇 달 만에 다들 문 닫는 자영업 지옥도 끝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스니커즈 코디 요약
비즈니스 슈트 - 신지 마세요. 안 어울립니다.
세퍼레이트 정장 - 바지색과 어울리는 (브랜드 로고를 포함해서) 단색 가죽 스니커즈라면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 캐주얼 - (브랜드 로고가 너무 돌출한 것이 아닌) 단색 가죽 스니커즈라면 맵시 있게 신을 수 있습니다.
(스마트) 캐주얼 - 그냥 어울리기만 하면 아무거나 신어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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