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를 어지간히 잘 알아도 한글로 표기된 제목만으로는 무슨 뜻인지 짐작하기 거의 불가능하고, 한자로 병기된 제목을 본 경우에도 책을 어느 정도 읽어야 짐작할 수 있는 제목으로 이루어진, 하지만 그 제목덕에 일본의 밀실 살인사건 소설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겐자키 히루코 시리즈 또는 시인장의 살인 시리즈를 소개할까 합니다. (읽은 지 제법 지난 책이라 사실관계에 약간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사실 책 제목들이 오히려 스포일러입니다.
2017년 출간된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첫 추리소설인 <시인장의 살인>의 대단한 성공으로 시리즈로 3권까지 발행된 이 시리즈는 세권 모두 추리소설의 흔한 클리셰인 밀실살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살인사건에서는 추리소설과 달리 후더닛(whodunit)만 중요하지 하우더닛(howdunit)은 큰 의미가 없다고 함에도 소설의 진행은 노골적으로 사건현장을 밀실로 만듦으로써 후더닛(whodunit)은 물론 하우더닛(howdunit)에 큰 관심을 갖게 하는 기법으로 진행됩니다. 사실 밀실 미스터리의 재미는 누가 범인인지 보다는 그 사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독자가 더 흥미를 가지게 되고, 그 방식으로 범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결국은 범인이 되는 과정으로 진행되는 구조가 많기에 살인의 동기보다는 방식이라는 기술적인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기술적인 범행의 방식이 기기묘묘할수록 독자의 흥미는 커지기에 밀실살인만큼 좋은 클리셰도 드뭅니다. 아무도 들어가거나 나올 수 없는 곳에서 누군가가 범인에게 살해당하고, 탐정은 그 트릭을 밝혀야 하니까요. 밀실이 더 그럴듯할수록, 즉 사건 현장에 접근하기 어렵고 탈출하기 어려울수록 독자의 흥미는 배가되죠. 하지만 실제 살인의 과정에서는 어려운 밀실 살인보다는 적절한 알리바이의 확보나 범행동기의 은닉이 더 효과적이고, 현장이 아예 (사고나 자살 등) 살인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명백히 살인 사건으로 보이는 증거들이 넘쳐나는) 밀실 살인 현장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범인 입장에서는 좋은 방법이죠.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듯 밀실 살인이라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작가는 이 진부한 클리셰를 도입하기 위해 필요한 어쩔 수 없는 비현실적 상황을 사실상 초현실적 상황을 도입해서 해결합니다. 그 초현실적 상황이라는 것이 예를 들어 첫 작품인 <시인장의 살인>에서는 그 제목에 나온 대로 시인(屍人)/좀비입니다. 이마무라 마사히로는 좀비 떼의 발흥이라는 간단한 방법으로 통신, 교통의 발달로 현실에서는 사실상 일어나기 힘든 밀실을 만들어 냄과 동시에 그 좀비를 살인 방법의 트릭의 일부로까지 활용해 버립니다. 이 말도 안 되는 과감함과 비현실성 덕분에 나머지 모든 이야기들이 다 현실적이고 그럴듯해지는 마법을 발휘하면서 라이트 노벨 수준으로 보이던 작품이 갑자기 뛰어난 추리소설로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읽는 내내 눈살을 찌푸릴 내용을 보면서도 즐겁습니다.
추리소설에 좀비 떼가 등장하는 마당이니 다소 부실한 동기나 추리의 과정 따위는 신경 쓰이지도 않고, 솔직히 죽죽 읽어 내려가면서 거슬리지도 않습니다. 더군다나 좀비 떼가 창궐함에도 전반적으로 가벼운 소설의 분위기와 상반되게 오히려 작중에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진지한 담론까지 다루면서 아예 작품을 추리 담론에 대한 문학적 실험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추리작가의 추리소설 담론에 대한 자기 생체실험인 거죠!
물론 여자 주인공인 겐자키 히루코는 예쁩니다. 집안도 좋고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 김전일, 코난 등 일본계 탐정들이 가진 필수 능력이라 할) 자기 주변에 살인을 불러오는 초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외모나 성격 모두 전형적인 일본만화 히로인을 연상시킵니다. (영화판 <시인장의 살인>에서 <카케구루이>의 주인공 유메코를 맡았던 하마베 미나미가 겐자키 히루코를 연기했던데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인 하무라 유즈루는 이런 여주인공에 어울릴 만큼 극히 왓슨적입니다. 이 전형적인 일본만화 캐릭터들이 (조연까지도) 사건과 관련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물론 사건과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도 그 캐릭터가 할만한 전형적인 행동과 대사를 하는 게 작품의 단점이라 할 수 있는데, 작품 자체를 앞서 이야기 한대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사고 실험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작품에 독특한 창조적인 캐릭터성을 도입하는 것은 어쩌면 실험에 예기치 못한 변수를 도입하는 것이 될 수도 있어 바람직하지 못한 것 아니겠냐는 적절한 궤변으로 변호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겐자키 히루코 시리즈는 첫 권인 <시인장의 살인>을 읽고, 제가 말한 내용과 단점들을 생각하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수도 있지만, 어느덧 다음 권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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