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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댜길레프의 제국 - 발레 뤼스는 어떻게 세계를 사로잡았나 (루퍼트 크리스천슨 지음 / 에포크)

by 만술[ME] 2025. 4. 14.

위대한 춤은 허공을 가로질러 공간을 조각한 뒤 향수처럼 차츰 사라진다. 창시자가 떠나고 나면 짧고 불확실한 생이 남는다. 안무는 시나 그림 같은 영원한 힘을 거의 갖지 못한다. 카메라는 안무를 그저 이차원으로 납작하게 만든다. 춤의 외형적 움직임은 비디오와 기보법을 통해 전달될 수 있지만 춤의 영혼은 그럴 수가 없다. 피부밑에서 이뤄지는 미세한 동작과 의미를 추적하는 일은 안무가 본인이나 그와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거리가 늘어남에 따라 기억이 다른 것을 더하거나 빼기도 하고, 단지 잘못 기억해서 원형을 바꾼다. 다른 물체나 감각과 맞아떨어지도록 귀퉁이가 잘리고, 뉘앙스가 흐릿해지고, 모서리가 뭉툭해지고, 움직임은 진화해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기억은 생명체다. 우리는 우리 선조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움직인다. 리디야 로포호바는 파블로바의 부고 기사에 이렇게 썼다. "무용수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음악은 그녀를 다시 보게 해주지 못하고, 그녀가 우리에게 준 것을 느끼게 해주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말도 매일반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니진스키의 예술을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상상으로 그리는 것은 진실과 빈약하게 관련될 수밖에 없다. 양식은 변한다. 사람의 체격은 물론이고 필요한 훈련과 우아한 테크닉에 관한 생각이 변하기 때문이다. 현재 프티파의 이름으로 공연되고 있는 것을 본인은 얼마나 알아볼까? 그는 발레리나들의 큰 키와 깡마른 몸매 그리고 그들이 극단적으로 다리를 뻗는 것과 남성 파트너들이 복잡한 공중 동작을 수행하는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전기를 사용하는 무대 조명과 라이크라 타이츠는 말할 필요도 없다. 어쩌면 카르사비나의 매력과 니진스키의 카리스마도 요즘 같으면 단지 별스럽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21세기에 남겨진 발레 뤼스의 흔적은 그림자와 윤곽들, 책 속에 얼어붙은 이미지들,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대한 기억들이다.  (본문 중에서)

 

 

 

 

몇 년 전 <Gramophone>에서 (우리에게는 일반적으로 디아길레프로 친숙한 - 앞으로 이 글에서는 이 이름으로 쓰겠습니다) <댜길레프의 제국 - 발레 뤼스는 어떻게 세계를 사로잡았나>의 서평을 접한 뒤, 국역으로 나올 것 같지 않아 원서를 구입하려다가 이런저런 사정에 의해 잊고 있었는데 때로는 망각도 도움이 되는지 번역 출간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읽었습니다.  

 

제가 디아길레프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음반을 통해서입니다. 라이선스 LP의 뒷면 해설에는 센세이셔널했던 초연에 대한 이야기가 당연히 들어 있었고 (<봄의 제전>에 대해 말하면서 누가 초연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스트라빈스키 외에도 초연의 지휘자인 몽퇴, 디아길레프, 니진스키 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처음 디아길레프와 발레 뤼스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발레 애호가는 아닌, 음악과 미술과 문학의 애호가인 저로서는 발레 뤼스와 디아길레프라는 이름은 발레를 매개로 하기는 했지만, 스트라빈스키 외에도 드뷔시, 라벨, 사티, 마르케비치 등의 음악가나 피카소 등의 미술가, 또는 콕토, 그리고 전반적으로 벨에포크 시절의 파리와 유럽의 문화계와의 연계하여 연상되는 이름이었습니다. 위 인용문에도 나와 있듯 저는 니진스키나 파블로바를 보지 못했지만 그들이 춤을 춘 음악을 들을 수는 있고, 그들이 만난 사람들, 그들의 춤을 본 사람들의 기록은 읽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제가 기대했던 디아길레프와 발레 뤼스에 대한 책은 매콜리프의 파리 3부작의 디아길레프와 발레 뤼스로 범위를 압축한 심화버전이었는데, 루퍼트 크리스천슨의 이 책은 저자가 지독한 발레트망이라 말한 만큼, 제가 기대한 내용들은 오히려 배경이고 발레가 중심축에 서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제가 기대했던 이름들은 이 이야기의 주역이 아니고 이 책은 디아길레프와 니진스키, 마신, 파블로바, 카르사비나 등이 주역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역인 순간도 발레 뤼스와 연결되는 지점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안나 파블로바는 발레 뤼스와 연관된 그 명성과는 달리 (후반에는 가끔 언급되기는 해도) 이야기에서 빨리 퇴장합니다.

 

제 기대와는 달랐지만,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의 자주 상연되는 몇몇 유명한 작품과 오페라에 삽입된 발레 정도에만 관심이 있는 제게도 <댜길레프의 제국 - 발레 뤼스는 어떻게 세계를 사로잡았나>는 여전히 흥미로운 책입니다. 오페라와 같은 인기 있는 공연물의 부산물이나 막간극 정도의 지위였던 발레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 디아길레프와 발레 뤼스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 경쟁자와 후계자들을 만들어냈는지에 대한 심도 있고 통찰력 있는 책이자, 여전히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단면과 사건의 단편들을 찾아볼 수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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