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읽은 책 몇 권에 대한 짧은 소개입니다. 우연찮게 모두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발간된 책인데, 딱히 출판사와 연관이 있거나 일부러 골라서 읽고 평을 올리는 것은 아닙니다만, 뭔가 글항아리에서 출간하는 책이 제 취향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는 반증이기는 하겠습니다.
<폼페이, 사라진 로마 도시의 화려한 일상> (메리 비어드 지음 / 글항아리)
제 이탈리아 여행의 남방 한계선은 로마였기에 폼페이를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제가 생각하는 폼페이의 모습은 어린 시절에 본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1959), <폼페이: 최후의 날>(2014), 그리고 이런저런 다큐와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폼페이>를 통해 형성된 것입니다. 2014년 영화가 당초 계획대로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했다면 아마도 제대로 된 폼페이에 대한 영화가 되었을 터이지만, 감독의 사정으로 취소되어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기에 어찌 보면 제게 현실적인 폼페이의 모습을 그나마 알려줬던 것은 해리스의 소설이 전부라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대의 도시 폼페이에 대한 생각은 저와 별반 다르지 않게, 평화롭게 번영하던 고대 도시 폼페이가 어느 날 느닷없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순식간에 재난을 맞아 멸망하는, 그래서 후대에 그 멸망 당시의 생생한 모습 그대로 발굴된 일종의 타임캡슐이라는 생각일 겁니다. 하지만 실제는 이와 전혀 다르게, 폼페이는 그 극적인 폭발 이전에도 화산으로 인한 지진 피해로 시달렸고, 어떤 건물은 아마도 화산 폭발 이전부터 부서진 상태로 방치되거나 보수 중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폭발 전조증상이 있었기에 폭발 당시에 상당수의 시민들은 이미 대피를 한 상태였으며, 폼페이라는 도시가 어느 날 갑자기 발굴되어 역사에 나타난 것은 아니고 대재앙 직후부터 도굴을 포함한 유물 파괴는 시작되어, 때로는 발굴된 유물이 당시의 것인지, 아니면 그 이후에 도굴꾼이 떨구고 간 것인지 구별하는 것도 큰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반인들에 알려진 고대도시 폼페이에 대한 허상을 벗기면서도 너무 학술적이지 않고 일반인도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쓴 책이 메리 비어드의 <폼페이, 사라진 로마 도시의 화려한 일상>입니다.
폼페이처럼 한순간에 그 생명력을 다한 도시라 할지라도 그 도시의 역사성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화산재속에 묻힌 도시의 모습은 그 당시의 폼페이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이전부터 변천해 온 과정을 담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서울이 오늘 이 순간 갑작스러운 천재지변으로 모든 삶이 정지된다 해도 그 정지된 모습이 2025년 오늘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조선시대 또는 더 이전부터의 문화와 삶의 궤적 또한 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책은 우리가 상상하던 폼페이의 모습과는 약간 다른 진짜 폼페이를 우리 앞에 펼쳐줍니다.
<차·향·꽃의 문화사 - 동아시아 역사 속 아름다움의 자취들> (김영미 지음 / 글항아리)
이번에도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제게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꾸준히 내주는 글항아리의 책입니다. <차·향·꽃의 문화사>는 생필품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을 품격 있게 만들어주는 대표적인 물건인 차, 향, 꽃과 관련해서 동아시아 3개국의 문물에 대해 그림과 글의 자료와 도자기 등의 유물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책의 저자인 김영미는 국립박물관에서도 일한, 유물 관련 전문가이기에 책의 내용은 흥미위주의 에피소드나 술술 읽히는 역사/문화서 느낌은 아닙니다. 오히려 상세한 설명과 배경지식을 담은 차, 향, 꽃과 관련된 문화재 전시의 도록의 느낌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실제로 이 책에 담긴 내용과 유물이면 전시회 몇 번을 하고도 남을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국립박물관 같은 곳에서 이 책에 담긴 내용 중의 한 테마, 한 나라에 대한 것이라도 실제로 전시를 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특히 각종 그림과 글 속에서 차, 향, 꽃과 관련한 풍습과 문물을 찾아내고 그와 연관된 실제 유물의 사진을 보여주는 저자의 씨실과 날실의 짜임 같은 정교한 서술방식은 저자의 지식과 연구력에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제 입장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도 제법 있는데, 예를 들어 처음에는 차를 죽과 유사한 형태로 만들어 마셨다거나 차를 마시는 방식은 상당기간 동안은 말차 이전에도 격불 해서 마시는 것이 대세였다거나 꽃을 병에 담아 놓은 것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전해진 것이며 감상의 의미보다는 공양의 의미로 시작된 것으로 감상의 의미가 된 역사는 생각보다 짧다는 것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그냥 아름다운 문화재의 사진들 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대명제국의 도시생활 - 황제부터 노비까지, 화려한 제국 시대의 모든 것> (천바오량 지음 / 글항아리)
출판사와 관계자가 아님에도 또 글항아리의 책을 올리게 되었는데, (다른 포스팅에도 글항아리 책 소개가 제법 됩니다) 워낙 많은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라는 것도 이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양한 책을 내놓다 보니 제 취향에 얻어걸리는 책도 그만큼 많은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죠. 또는 글항아리에서 마케팅을 잘해서 제 눈에 띄는 확률이 높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21세기 자본>을 팔아 번 돈만으로 이런 일을 하기는 힘들 텐데 이런 뭔가 대중적일 것 같지 않은 책들을 꾸준히 내놓는 출판사의 저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모화사인 문학동네의 자금력과 관용력이 대단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세 종류의 글항아리 책 중에 제목은 그럴듯해도 가장 읽기 녹녹하지 않은 책은 <대명제국의 도시생활>입니다. 이런 비유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잘 전달될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마치 <홍루몽>을 읽는 느낌으로, 말하자면 끊임없이 많은 등장인물들이 계속해서 비슷비슷한 이벤트를 만들어 내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드물게 번뜩 번뜩 매력적인 캐릭터와 재미있는 사건이 나타나는 것도 비슷합니다. 이런 책의 특성 때문에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어찌 보면 각자 하기 나름인데, 마치 책의 표지에 인용된 구영의 <청명상하도>의 명나라 리메이크 버전 그림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무심히 큰 틀만 바라보면 아무 느낌 없는 그림이지만, 하나하나 찬찬히 살피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면 수천, 수백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이지요. 이 책도 그렇습니다.
'책 - 게임 - 취미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게임]아즈텍(Aztec) (2) | 2025.03.20 |
---|---|
[독서]사카나(魚)와 일본 - 비릿 짭짤, 일본 어식(魚食) 문화 이야기 (서영찬 지음 / 동아시아) (4) | 2025.02.28 |
[독서]말과 글의 달인이 되는 법: 우리말 어원 사전 (조항범 지음 / 태학사) (2) | 2025.02.03 |
[독서]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와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추천 (4) | 2025.01.16 |
[독서]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 도쿠가와 가문은 어떻게 원예로 한 시대를 지배했는가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 글항아리) (2) | 2025.01.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