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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예술 - 공연

[미술]시모네타 베스푸치(Simonetta Vespucci)에 관련된 추억

by 만술[ME] 2024. 10. 23.

슈베르트의 <물레방앗간의 아름다운 아가씨>에 대한 글을 쓰면서 비더마이어 시대의 젊은 청년들만 <관념적인 사랑>에 울고 웃고 하지는 않았고 역사 이래 수 없이 많은 <관념적 사랑> 또는 <만들어진 이상향에 대한 사랑>이 있어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르테르의 선배인 르네상스 시대의 보티첼리도 당대 최고의 미인인 시모네타 베스푸치에 대한 관념적 사랑을 불태웠고, 결국은 그녀의 발치에 묻히기를 희망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죠. 유명한 <프리마베라>나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한 많은 작품에 보티첼리가 이상화한 시모네타가 등장하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고요. 저도 어릴 적 악타이온과의 에피소드에 반해 보티첼리의 시모네타 보다 더한 <관념>인 아르테미스에 대한 사랑을 품었고 <아르테미스의 초상>이라는 습작 단편까지 쓴 적이 있습니다. 현대의 젊은 가수나 배우들이 <아이돌>로 불리는 것도 이런 풍부한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전통일 겁니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미인이라 칭송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시모네타 베스푸치는 제 관심의 영역에 들어왔습니다. 더불어 예술(보티첼리)과 역사(줄리아노 메디치)에 대한 이런저런 지식들이 쌓여가면서 시모네타 베스푸치에 대한 제 관심은 더 커졌죠. 단지 최고 미인의 타이틀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티첼리의 뮤즈가 되고, 파란만장한 메디치 가문과 엮이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데다 아메리고 베스푸치와 인척이라니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더군다나 그 배경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탈리아 도시인 피렌체라니! (시모네타는 제노바 출신이긴 합니다만^^)
 
시모네타 탐방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보티첼리의 <비너스>나 <프리마베라>의 베스푸치는 우피치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만, 제가 가장 보고 싶었던 시모네타의 그림은 피에로 디 코지모가 그린 시모네타의 측면 초상화였습니다. 옆얼굴로 보이는 이마의 선, 노출되었지만 성적인 자극보다는 정결함을 보여주는 가슴, 목에 두른 꼬리를 물고 있는 뱀과 같은 상징성이 매혹적이었습니다. 시모네타는 피에로가 14살 때 죽었고 이 그림은 그녀가 죽은 지 15년 정도 후에 완성된 작품이니 그림이 시모네타를 정확하게 묘사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그림에 새겨진 <SIMONETTA IANUENSIS VESPUCCIA>라는 글도 작가가 아닌 사람에 의한 나중에 첨가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어 진짜 시모네타를 그린 것인지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미술관은 이 그림에 <여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보통 사람들이 보티첼리의 그림을 통해 시모네타를 접하는 것과는 달리 (비록 도판이지만) 이 그림으로 시모네타를 처음 알게 되었고, 오히려 이후에 피렌체와 메디치가의 역사, 보티첼리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기에 그림의 실제 모델은, 제게는 늘 <시모네타 베스푸치>였습니다.
 
이 피에로 디 코지모의 <시모네타 베스푸치(여인의 초상)>를 실제로 보게 된 것은 전혀 의도치 않은 결과였습니다. 2018년 가을, 와이프와 아이들은 와이프가 계획하고 준비한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테마로 한 달간 프랑스를 여행하기로 했고, 저는 초반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테마는 그럴듯하게 고흐의 발자취를 쫒는 것이지만 시계열적으로 편성된 것도 아니고 (이름난 화가의 작품 몇 점을 앞세워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많은 전시처럼) 꼭 고흐에 한정되는 것도 아닌지라 여행의 초반은 당연히 파리와 근교에 집중되어 오르세, 루브르, 로댕, 퐁피두 등의 파리 내 미술관과 근교인 베르사유, 샹띠이 등의 성과 그 내부의 미술관을 보는 일정으로 잡았고 이후에 아를, 오베르 쉬르 우아즈 등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기에 저는 초반 파리와 근교 일정을 함께 했습니다. 이전에도 프랑스를 몇 번 방문했고 주요 미술관도 관람도 했지만 이렇게 일정의 대부분을 미술을 보기 위해 편성한 적은 없었습니다. 다행히 근교 일정이 섞여 있어 자연경관이나 옛 건물을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미술 작품만 보는, 경우에 따라 지루할 수 있는 일정은 아니었습니다.
 
파리 근교 방문지에는 샹띠이도 있었는데, 쁘티 베르사유로도 불리는 샹띠이 성은 이때가 첫 방문이었습니다. 샹띠이 성은 사시사철 북새통인 베르사유 보다는 작고 덜 화려하지만 마음에는 더 와닿는 장소였습니다. 유럽의 많은 성이나 저택들이 그렇듯 샹띠이 성 내부에도 미술관이 있는데, 콩데 미술관입니다. 여행 계획자체를 미술을 좋아하는 와이프가 짰고, 저는 얹혀가는 입장인 데다 일정에 포함된 상당수의 장소는 이미 가본 곳이라 평소 여행과 달리 이 여행은 전혀 공부를 안 하고 간지라 콩데 미술관은 전혀 사전정보 없이 방문했습니다. 라파엘로의 <삼미신> 같은 콩데 미술관의 대표작을 감상하면서 "아, 이 작품이 여기 소장되어 있구나!" 감탄하며 걷는데, 맙소사 홀 끝쪽의 전시실에 크게 걸린 <로레트의 마돈나> 곁에 작은 <시모네타 베스푸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오래전 도판에서 본 콩데 미술관이라는 이름이 갑자기 머리에 떠오름과 동시에 라파엘로의 그림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성모의 아름다움을 곁에 두고 세속의 아름다움에 빠져든 속된 영혼이 되었죠.
 

피에로 디 코지모의 &amp;lt;시모네타 베스푸치&amp;gt; 또는 &amp;lt;여인의 초상&amp;gt; (콩데 미술관, 샹띠이 성)

 
아마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정치>가 묻어 있을 겁니다. 그녀는 메디치 가문의 동맹이자 피렌체의 유명가문의 며느리였고, 메디치 가문이 자랑하는 미남 줄리아노의 <궁정 사랑>의 대상이었으며, (요즘 관점에서는) 이를 통해 마상 창경기에 이긴 줄리아노에 의해 <미의 여왕>으로 선포되는 등 다양한 마케팅에 활용되었고, 죽어서도 관뚜껑이 열린 채 피렌체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녀의 흠모자들에게 미모를 자랑해야 했습니다. 오히려 사후에 그녀에 대한 작품이 더 늘어난 것을 생각하면 이 가문들은 철저하게 그녀의 이미지를 활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보티첼리의 짝사랑도 알면서도 오히려 이용했겠지요.   
 
시모네타 베스푸치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면 아마도 예전이라면 르네상스 피렌체라는 아름다운 무대를 배경으로 줄리아노 메디치와의 사랑과 비극적인 요절을 그린 매우 낭만적인 영화가 되겠지만, 요즘이라면 거대 가문의 정치놀음 속에 꼭두각시처럼 <간판 아가씨>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그래서 죽어서도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던 여성에 대한 여성주의적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진실은 이 중간 어디쯤에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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