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 불멸의 오페라 프로젝트]
전에 언급한 바 있지만, 캐나다로 이민 가는 동료의 책장 정리의 일환으로 박종호 선생의 <불멸의 오페라> 1, 2권을 얻게 되었고, 내친 김에 그 책에 나온 오페라들을 체계적으로 들어보자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 개인적인 프로젝트지만 꾸준히 진행해서 2015년 시작한 프로젝트가 이제는 2권 중반인 모차르트까지 도달했습니다. 이 와중에 <불멸의 오페라>는 3권이 나왔고, 그리고는 전권이 절판되어 언젠가는 새롭게 개정판을 내겠다는 박종호 선생의 호기로운 이야기까지 나오는 상황입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지지부진한 것 같지만, 제 게으름만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 제 취미생활이 오페라 듣기만도 아닌지라 프로젝트에 투자할 시간이 만만치 않고, 오페라라는 것이 짧으면 두 시간, 길면 네 시간도 넘어가는 공연인지라 한편 감상에도 제법 시간이 소요되며, 오페라에 한정해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메트나 다른 오페라 극장의 신작들도 챙겨봐야 하기에 오페라를 프로젝트에 한정해서 감상할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작품당 한번 보고 듣고 끝내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가지고 있는 소스는 모두 보고 듣자는 생각에서 시작했기에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의 경우에 메트의 온디맨드 서비스로 볼 수 있는 영상물만 5종에, 들을 수 있는 실황 녹음이 12종이고 제가 가진 BD, DVD, CD를 합하면 한 작품을 끝내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여기에 만약 T&F 뮤직을 위해 개인적으로 녹음한 실황들까지 합치면 그 방대함은 말로 다 못할 지경이죠. 1권이 48 작품, 2권이 51 작품을 다루고 있으니 3권까지 중고로 구해서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으면 아마 10년은 더 소요될 것 같습니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베르디, 푸치니, 로시니, 벨리니 등의 오페라를 집중 감상해왔는데 막상 블로그에 그와 관련한 제대로 된 글을 올린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을 갑자기 하게 되었습니다. 베토벤 7번과 슈베르트 <물레방앗간의 아름다운 아가씨>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블로그에 정리를 한번 했던 것이 생각보다 유용했다는 생각 때문인데, 지나간 오페라들을 다시 상기하며 글을 올리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 현재 보고 듣고 있는 모차르트의 오페라들에 대해 한번 정리를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한편을 집중 감상하는 것도 일인지라 올리는 주기는 부정기적일 수밖에 없고, 경우에 따라서 중간에 소리소문 없이 중단될 수도 있습니다.
[오페라 <미트리다테>에 대하여]
<미트리다테>에 대한 역사라던가 해설 같은, 인터넷에서 쉽게 열람이 가능한 내용에 대해서 이곳의 지면을 낭비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미트리다테>는 모차르트가 14세때 작곡한 작품으로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수도였던 밀라노 궁정극장의 의뢰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당시 모차르트의 나이나 커리어로 짐작할 수 있듯 작곡자의 선택권이 제한되어 대본도 극장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고, 초연을 하기로 한 가수들의 입김도 상당했던 작품입니다. 다른 종류의 오페라도 그렇지만 특히나 오페라 세리아는 줄거리나 극적 긴장감보다는 가수들이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것이 중심인 장르인지라 모차르트는 다양한 갑질에 시달리며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내용은 역사상 실존 인물인 폰투스의 미트리다테 6세에 대한 라신의 희곡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많은 오페라나 당시의 문학작품들이 그렇듯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이 많습니다. 초연은 제법 성공적이었고, 초연 이후에도 여러차례 공연이 지속되었지만, 많은 예술작품이 그렇듯 <미트리다테>도 극장 레퍼토리에서는 잊힌 작품이 되었습니다. 주요 유명 레퍼토리를 주야장천 재탕하는 현대의 오페라 극장의 실태와 달리, 현대의 관점에서는 영화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개봉 때는 1000만 관객이 들어도 주기적으로 재개봉을 하지는 않고 늘 새로운 작품이 나오듯 오페라나 음악도 관객은 늘 새로운 작품을 선호했습니다.
이런 냉대는 현대에 와서도 지속되었는데, 모차르트의 오페라 세리아가 모차르트의 다른 오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고, 세리아 내에서도 <이도메네오>나 <티토의 자비>를 먼저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그렇다 보니 공연은 당연하고 음반으로도 <미트리다테>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첫 전곡 녹음이 나온 것은 1977년으로 레오폴트 하거가 필립스에서 한 녹음이 최초이자 결정반이었습니다. LP시절에는 이 음반은 국내에 유통되지는 않았고, 이 음반이 CD로 나오게 된 것은 1991년 모차르트의 사망 200주년을 기념하여 (지금은 데카와 통합되어 사라진 레이블인) 필립스에서 무려 180장의 음반에 모차르트의 모든 음악을 담아 발매한 <The Complete Mozart Edition>에 포함되면서부터입니다.
필립스의 <The Complete Mozart Edition>은 당시로서는 이걸 진짜로 구입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엄청난 구성에 엄청난 가격의 박스로 제가 들은 구매 사례는 클래식 애호가이자 모차르트 음악을 무척 좋아하셨던 만화가 신동헌 화백 정도입니다. 이 세트는 장르에 따라 편성한 45개의 묶음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아마 시간차는 있었지만 각각의 묶음을 구입할 수도 있었습니다. 저도 전부는 언감생심이지만, 몇가지 묶음은 구입했고, 지금도 잘 듣고 있습니다.
이 최초의 음반인 하거판은 225주년을 기념하며 유니버셜이 DG, Decca, Philips의 음원을 묶고 새로 발굴된 아이템등을 추가해서 비교적 염가로 (하지만 패키징도 염가가 된) 2016년 발매한 <Mozart 225>에서는 루세 지휘의 새로운 음반으로 교체됩니다. 아울러 현재는 폐반이되어 구할 수 없습니다. <미트리다테>는 모차르트의 많은 오페라 중 아예 무대에 올려지지 않는 오페라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여전히 영상물이나 음반이 많지는 않은 편에 속하며, 아래 제가 소개하는 정도가 그나마 구할 수 있는 전부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영상물]
앞서 이야기한 대로 오페라 세리아가 흔히 그렇듯 <미트리다테>도 내용의 물흐르는 전개와 스토리의 긴장감보다는 다양한 가수들의 기교 뽐내기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렇다 보니 아리아의 순서를 바꾸거나 생략해도 큰 문제가 없기도 하죠. 다만 줄거리가 아버지와 두 아들의 갈등, 두 형제간의 갈등, 사랑의 삼각관계 등 드라마적인 요소가 많아 현대적으로 재해석만 잘하면 좋은 연출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그나마 <미트리다테>라는 오페라가 지금과 같은 인지도를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구할 수 있는 영상물 중 가장 근본이라 할 수있는 장 피에르 포넬 연출의 영화판 영상(아르농쿠르 지휘, DG)은 기본적인 줄거리를 비틀지 않은 고전적인 연출이지만, 1986년이라는 시점을 생각해도 조금은 과장된 연기와 연출이라는 생각입니다. 지금 보기에는 너무 <세리아>스럽습니다. 음악적으로는 아르농쿠르의 박진감 넘치는 지휘와 가수들의 수준 높은 노래가 충분한 만족을 줍니다.
소위 M22(2006년 모차르트의 오페라 22개를 모두 공연하고 영상에 담아 발매한 프로젝트)라 불리는 2006년 잘츠부르크 실황 영상(민콥스키 지휘, Decca)은 귄터 크래머의 창의적인 무대와 연출이 돋보이고 민콥스키의 박력과 생기 넘치는 지휘와 크로프트, 페르손, 오르, 메타 등의 훌륭한 성악가진이 잘 어울린 영상입니다. 이 오페라의 줄거리를 잘 알고 있다면 상관 없지만만, 이 오페라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이 영상물로 시작하기에는 다소 전위적인 연출이 스토리를 따라가기 힘들게 되어 있어 처음 <미트리다테> 공연을 보려는 분에게는 권하기 힘듭니다.
원작의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갈라 콘서트를 연상시키는 오페라 세리아식의 아리아-쇼케이스를 벗어난 좋은 연출 중 하나는 2017년 샹젤리제 실황(아임 지휘, Erato)입니다. 현대로 배경을 옮겼지만 과격한 비틀기나 지나친 상징주의적 연출 없이 정치적 드라마로서의 의미가 잘 부각된 연출로 재탄생했습니다. 여기에 미트리다테를 노래하는 스파이어스, 쁘띠봉, 파파타니시우, 드비엘 등 요즘 <미트리다테>를 잘 부르는 가수들이 훌륭한 노래와 연기를 보여줍니다. 식상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비틀지 않은 연출과 훌륭한 음악으로 가장 추천할만한 영상입니다.
모네에서의 공연실황은 예전 Arte를 통해 보고 흥미로웠던 공연인데, 영상물로 발매되지는 않았지만 유튜브에 올라와 있고 연출과 설정이 매력적이라 특별히 언급합니다. 루세 지휘에 스파이어스, 파파타나시우, 루이텐 등이 가수로 참여했습니다. 이야기를 현대로 옮기면서 폰투스 왕국과 EU(극 중에서는 로마연합)의 갈등으로 현실성을 더했으며, 원작의 장소인 님페아를 도시가 아닌 EU 회의가 열리는 브뤼셀의 빌딩 이름으로 설정한 뒤, 줄거리를 이 회의장에서 일어나는 정치극으로 재해석해서 그럴듯한 드라마를 만들어 냈습니다. 약간 아쉬운 점은 루세의 지휘가 아임이나 민콥스키에 비해 박진감이 조금 떨어진다는 것인데, 가수들의 노래는 매우 좋습니다. 극 중 로마연합 대표인 마르지오 역을 맡은 로마노프스키의 이미지가 젊은 시절의 푸틴을 연상시켜 지금 다시 보면 뭔가 NATO 가입을 배경으로 한 우크라이나-러시아 갈등과 관련한 드라마의 느낌도 듭니다.
[음반]
브릴리언트 모차르트 전곡 박스에 포함된 웬츠 지휘의 음반은 유명한 연주자들이 참여하지는 않았음에도 전반적으로 양호한 결과를 얻은 음반입니다만, 다른 경쟁자가 워낙 막강하고 현재는 음원 외에 CD로는 구할 수도 없어 추천할 이유는 없습니다.
루세의 데카 음반은 사바티니, 드세이, 바르톨리에 단역으로 초창기의 플로레즈까지 엄청난 출연진을 자랑하는 음반입니다. 뛰어난 가수들이 부르는 기교 넘치는 아리아들은 오페라 세리아의 맛을 만끽하게 해줍니다. 전체적인 드라마를 무시하고 아리아만 듣는 용도로도 매력적입니다. 가수 하나하나가 목소리 만으로도 개성 넘치는 가창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CD로는 지금은 33장의 CD와 19장의 DVD로 구성된 나탈리 드세이 박스로만 구할 수 있다는 것인데, 아니면 스트리밍을 이용해야 합니다.
CD로 구할 수 있으면서 가장 최신의 연주이자 최고의 연주는 민콥스키가 스파이어스, 드라이직, 드비엘, 푸흐 등을 기용하여 2021년 Erato에서 발매한 음반입니다. 루세 음반이 이전 세대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수를 모았다면, 민콥스키는 최고의 젊은 현역을 모은 음반으로 성악가들의 노래도 흠잡을 곳 없이 훌륭하고, 특히 민콥스키의 지휘는 언제나 그렇듯 강약과 박진감이 절묘합니다. 드라마와 가창이 모두 잘 살아 있는 음반으로 현재 구하기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추천할만한 음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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