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어릴 적이지만 개봉 시 영화관에서 <죠스>, <스타워즈>, <슈퍼맨> 같은 영화를 봤습니다. 이 영화들은 내용도 매력적이었지만, 어린 나이에도 음악이 또 하나의 주연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던 영화입니다. <죠스>는 부모님, 두 살 아래 여동생과 함께 보았는데, 극장을 나오면서부터 상당 기간 동안 동생과 둘 중 누군가 슬쩍 다가가며 죠스의 테마를 읊조리면 다른 사람은 까무러치듯 무서워하는 우리만의 놀이를 즐겼습니다. 대학시절에는 큰 키에 <프랑켄슈타인>의 몬스터를 연상시키는 이국적 얼굴을 지닌 친구가 있었는데, 겨울이면 늘 거의 발목까지 내려가는 검은색 긴 코트를 입고 다녔습니다. 저는 공부한다는 핑계로 도서관 목록카드가 있는 개방된 공간의 넓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오가는 선후배, 친구들의 안내역할을 자처하곤 했는데, 그 친구가 도서관 입구를 들어와 제게 다가오는 동안 (도서관에서 그러면 안 됨에도) 임페리얼 마치를 불러대곤 했습니다. 영화에 푹 빠져 지내던 시절에는 존 윌리암스의 외모를 모델로 한 토마스 매클런이라는 함장이 주인공인 우주전함이 등장하는 시리즈의 시놉시스를 작성하면서 각 장면에 인용될 음악을 존 윌리암스의 음악으로 채워놓기도 했습니다. 이 시리즈에 대해 행여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분위기를 말씀드리면 스타트렉적인 상황을 극히 정치적인 내용과 전함내외의 갈등으로 치환하고, 그 해결의 상당 부분은 무력사용으로 결말 지워지는, 스타워즈와 스타트렉, 배틀스타 갤럭티카의 혼종 정도의 느낌이라 하겠습니다. 어찌 보면 존 윌리암스의 음악은 단순한 감상용 음악이 아니고 제 삶의 OST 이기도 했던 거죠.
존 윌리암스의 음악을 듣게 된 첫 매체는 어머님이 친한 레코드 가게에서 제 신청 음악을 녹음해 오신 카세트테이프를 통해서였지만 (당시에는 길거리 리어카 말고도 레코드 가게에서도 단골들에게 구하기 힘든 음반이나 이런저런 컴파일레이션 스타일의 녹음테이프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정식 음반은 보스턴 팝스와 녹음한 <우주 속의 팝스> (Pops in Space) 앨범이었습니다. 이 음반은 보스턴 팝스와 존 윌리암스의 첫 음반이었고, 음반의 제목에 걸맞은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 <슈퍼맨>, <미지와의 조우>의 음악이 담겨 있습니다.
이 LP는 이후 일본의 로컬 발매 등으로 CD로도 발매되기는 했지만, 널리 공급되지는 못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음반입니다. 그러다 프랑스 유니버셜 뮤직에서 기획 발매한 호화 패키지인 <존 윌리암스의 전설>(The Legend of John Williams)에 보스턴 팝스의 다른 음반에서 발췌한 <제다이의 귀환> 등의 곡들과 함께 전곡이 (순서는 뒤죽박죽이 되었지만) 재수록되어 고비용을 감내한다면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호화 패키지는 <스타워즈>의 음악은 보스턴 팝스의 연주회 버전으로만 들어 있고, 시퀄이나 프리퀄의 음악도 빠져 있으며, <해리포터> 등의 일부 음악도 빠져있습니다만, 오히려 쉽게 구할 수 없는 올리버 스톤, 론 하워드 등의 영화 음악이라던가 서부영화 음악 등까지 수록되는 등 일반적인 패키지와는 좀 다르고 이 글에서 다루는 보스턴 팝스와의 음반들에서 발췌한 연주들도 들어 있는 등 나름의 차별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지만 <스타워즈> 등의 OST는 런던 심포니가 참여해 녹음을 했는데, 존 윌리암스가 오랜 기간 상임으로 지휘한 보스턴 팝스도 그 기원이 보스턴 심포니의 비시즌 오케스트라인 만큼 뛰어난 연주력을 자랑합니다. 살짝살짝 연주회용으로 편곡된 음악들이고, 영화화면에 얽매인다는 제한도 없는지라 OST에 비해 템포는 더 활기차고, 연주도 더 활기찹니다. 근자에 존 윌리암스는 비인 필, 베를린 필 등과 최신 연주회 버전을 수록한 실황 녹음을 내놨지만, 특히 비인 필의 연주는 천의무봉 같이 빼어나 연주회용 음악으로는 상당히 품격있고, 정교한 음악으로 구현되었지만, 영화음악으로서의 긴장감과 흥겨움, 감정의 폭발이라는 면에서 다소 부족했는데, (두 최상의 악단의 실황 중 하나를 택하라면 저는 보다 기능적이고 긴장감을 잘 표현한 베를린 실황을 택하겠습니다) 보스턴 팝스의 이 음반은 스튜디오 녹음임에도 긴장감과 흥겨움에서는 앞서 있고, <심각한 음악인 채> 하지 않는 겸손함(?)이 오히려 매력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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