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 게임 - 취미생활

[독서]앨리스 먼로 - 편집자의 이야기 (데보라 트리스만)

by 만술[ME] 2024. 5. 21.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앨리스 먼로의 부고를 듣고 예전 그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번역해서 올린 글로 그녀에 대한 추모의 글을 대신할까 합니다. 번역은 수정하지 않았고, 오탈자 정도만 수정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다 읽고 나면 그녀의 책을 한 두권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최초 기고일 : 2013.10.11]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앨리스 먼로(Alice Munro)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녀와 인연이 깊은 뉴요커의 편집자 데보라 트리스만 (

Deborah Treisman)이 이를 기념하여 뉴요커에 기고문을 올렸는데 무단으로 번역해서 포스팅합니다. 이번에도 그냥 잉여력 폭발로 한 초벌 번역이니 그냥 참고만 하세요.    

 

그래도 그녀의 수상 소식을 이제 누가 모른다고 뉴스 퍼다 나르는 블로그 보다 좀 낫다 생각해 주시길~!

 

 

앨리스 먼로의 이야기들을 편집하는 것을 때때로 뜻밖의 경험을 안겨준다. 내가 마지막 문단이 제대로 결말 지워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할라치면 그녀는 먼저 새로운 엔딩을 팩스로 보내오며, 내가 5쪽이 뭔가 제대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라 표시해 놓을 참이면 그녀는 5쪽을 다시 구성해서 메일로 보내놨다는 전화를 걸어온다. 어떤 때는 10쪽의 한 문단이 흐름과 벗어나는 불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되어 삭제한 뒤, 32쪽을 읽고 나서야 왜 그 삭제된 부분이 줄거리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인지를 이해하고 다시 살려내곤 한다. 

 

우리가 전화를 통해 교정을 볼때 앨리스는 검토된 페이지들을 바닥에 던져 놓곤 한다. 덕분에 이전에 논의된 장면으로 돌아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바닥을 뒤져야 하기에 그녀는 "잠시만 전화를 내려놓을게요"라고 말하곤 한다. 이런 과정은 즐거우면서도 편집 중인 이야기를 위해 가치 있는 일이다. 그녀가 제안된 편집에 반대를 할 경우는 언제나 그녀가 옳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그녀가 공식적으로는 은퇴했음에도 나는 현재시재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누구나 희망을 가질 수는 있는 일 아니겠는가. 그녀는 이전에 한번 글쓰기를 중단하려 했지만 새로운 문집을 집필한 적이 있다.)

 

앨리스는 이야기에 어떤 특정한 문학적 경향이나 사상적 목적을 주입하려 하지 않으며 내러티브 디자인 보다는 캐릭터의 동기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최근의 대화에서 그녀는 "<마벌리를 떠나며>에서 많은 등장인물들이 사랑이건 섹스건 뭐던 간에 추구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기회를 놓치게 되는 반면 남편과 그의 병든 아내는 추구하는 바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주로 그녀가 사는 온타리오의 시골이나 브리티쉬 콜롬비아의 도시지역 같은 특정한 공간이나, 그녀가 겪어온 시대를 이야기한다. 이야기들은 그녀 자신의 삶에서 디테일들을 취하지만 그녀 부모들에 대한 추억에서 직접 비롯된 몇몇 이야기들을 제외하면 자전적 요소들은 일반적으로 개별사건에 대한 정밀한 묘사보다는 감정적인 경험에 의거하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그녀가 어릴 적에 경험한 캐나다 지방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궁핍함, 나이 어린 엄마, 사랑, 간통, 배신, 때 이른 죽음, 아이의 죽음, 늙어감과 같은 반복되는 모티브가 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들은 노골적으로 주제를 들어내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그녀의 구상이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것이라는 것, 그래서 그녀가 그녀의 내러티브를 머릿속에서 짜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화해 낸다는 것을 느끼고, 캐릭터들이 그녀가 그들에게 던져준 상황들에 대해 반응하는 것처럼 그녀의 캐릭터들에 반응한다. 동시에 작품에는 세밀히 계산된 측면도 있는데 정보와 감정은 조심스럽게 감춰지거나 가려져있어 줄거리의 비틀림을 미리 알아채기는 불가능하지만 결말에 이르면 그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드러난다. 

 

 

앨리스는 위대한 작가들 중 평생 단편에 충실했던 드믄 경우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뚜렷이 기억되는 것은 전체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순간들이며, 내러티브 전체가 이 짧은 순간들에 의존한다. 그녀의 작품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아버지가 아이들을 죽인 순간이 아닌 그가 이후 감옥에서 아이들 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순간의 문장들을 보라 :  

 

 

난 단지 이렇게 말하고 싶소. 난 아이들을 늘 보아왔다고. 난 아이들을 보고 또 말해왔다고. 그곳에서 말이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소?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아니면 꿈일 거라고 내가 꿈을 착각한다고. 내가 꿈과 현실을 구분 못한다고. 하지만 난 그 차이를 알고 있다고, 그리고 아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싶소. 난 아이들이 살아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들이 존재한다고 했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특정한 차원을 의미하고 난 그 특정한 차원에 아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요. 사실 난 그곳에는 아이들이 없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아이들은 존재하오. 틀림없이 다른 차원, 무수한 다른 차원들이 있을 것이고 아이들이 어느 차원에 있건 난 그들과 접촉하고 있소. 아마 내가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기에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르오. 난 그런 고통과 외로움 후에 내게 이런 보상이 주어지는 용서를 받았소. 세상의 관점에서 제일 보잘것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마땅한 그런 보상말이오.

 

또는 "자갈"에서 어린 소녀의 자매가 강아지를 호수로 던지고, 구하기 위해 급히 뛰어들고, 익사하는 순간을 보라 : 

 

 

나는 머리속에서 그녀가 강아지 블릿지를 집어 강아지가 그녀의 코트에 매달리려 함에도 집어던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구조를, 카로가 강아지를 구하기 위해 물로 뛰어드는 것을, 달리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하지만 나는 그들이 잇달아 물에 뛰어들 때 나던 소리는 기억해 낼 수 없다. 작은 소리건 큰 소리건간에. 아마 나는 트레일러를 향했던 것 같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내가 이 꿈을 꿀 때, 나는 언제나 달리고 있다. 그리고 꿈속에서 나는 트레일러가 아니라 반대편 자갈 구덩이 쪽으로 달리고 있다. 나는 블릿지가 몸부림치고 카로가 헤엄쳐서 다가가는 것을, 블릿지를 구하기 위해 힘차게 헤엄치는 것을 본다. 나는 그녀의 연한 갈색 체크무늬 코트와 격자무늬 스카프, 그리고 해낸 걸 자랑스러워하는 얼굴, 물에 젖어 끝부분이 어두운 빛을 띤 붉은 머리카락을 본다. 내가 할 일이라곤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행복해하는 것뿐이다 - 어찌 되었건 이 상황은 날 필요로 하진 않는다.  

 

이런 순간들은 보통 이야기의 결말이나 클라이막스의 중간에 배치되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2/3이나 3/4쯤에 위치하는데 이 지점, 이야기들은 충분히 마무리되어 가고 있고, 사건들은 자리를 잡았으며, 관계들은 발전했거나 이미 무너졌고, 사람들은 죽거나, 성장한 바로 그 지점에서 먼로의 단계라 할 수 있는 단계가 더 있는데, 그 단계는 이야기를 갑자기 새로운 곳으로 이끈다. 그리고는 다른 하급 작가들처럼 우리를 변화에 대한 당혹과 놀라움 속에 내버려 두지 않고, 앨리스는 폭로와 놀라움과 충격을 지나 그것이 회환의 감정이건 기쁜 감정이건 우리를 모종의 이해와 수용의 단계로 부드럽게 이끈다. 어떤 것도 깨끗이 마무리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는 황량한 벌판을 지날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우리는 이야기 속을 직접 체험해야 하기에 앨리스의 책을 많이 읽을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진이 빠지고, 힘들 수 있다. 우리는 예민하고 감각이 고양된 상태에, 만족과 흥분 속에 남겨진다. 가장 슬픈 건 우리가 남겨진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을 남겨진 우리에게 다시 돌려주는데 기여한 노벨상 위원회에게 영광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