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E와의 인연
저는 AFKN이 채널 2번에서 공중파로 나오던 시절부터 WWE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헐크 호건, 랜디 새비지, 워리어 등이 활약하던 시대였는데, AFKN을 통해 주로 볼 수 있는 방송은 슈퍼스타가 자버를 상대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치는 < WWF Superstars of Wrestling> 같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슈퍼스타 간의 경기를 볼 수 있는 건 사실상 PPV 이벤트(지금은 PLE) 정도로 정말 가뭄에 콩 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WWE와의 역사는 테드 터너의 돈질로 시작한 WCW와의 경쟁, 더 락이 로키 마이비아로 데뷔하던 사건, 스티브 오스틴이 데뷔하던 시절, 몬트리올 스크루잡, 에티튜드 시대 등을 거쳤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스토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즘 같은 공식 자막방송이 없었기에 (80년대에는 정말 지독히도 이상한 발음을 구사하던) 선수들의 세그먼트를 열심히 들어야했고, 그 부수효과로 딱히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의 영어 듣기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국내에 공식 중계도 이루어지고 팬층도 늘어났지만, 저는 케이블 TV나 인터넷 방송과는 친하게 지내지 않았기에 WWE와는 담을 쌓은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작년에 삼성에서 LG로 TV를 바꾸고 기본으로 제공되는 자체 인터넷 방송인 LG채널을 알게 되었는데, 그 채널 중 하나가 WWE 채널로 몇 주 전에 있었던 RAW, Smackdown, NXT를 반복 송출하는 채널이었습니다. 이렇게 가끔 시간 날 때마다 몇주 지난 방송을 보던 중 ib스포츠에서 방송하는 RAW와 Smackdown을 제게는 VJ들이 별풍선 받아 돈 버는 플랫폼으로만 알려진 <아프리카 TV>에서 VOD로 제공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는 TV에 설치한 <아프리카 TV> 앱을 통해 방송을 보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지난 주말에 있었던 WWE 이벤트 중 가장 중요한 이벤트인 <레슬매니아 40>에 대한 소감을 간략히 적고자 합니다.
아래에는 <레슬매니아 40> 경기결과에 대한 스포일러가 잔뜩 들어 있습니다. |
레슬매니아 1일 차
위민스 월드 챔피언십 (리아 리플리 vs 베키 린치)
이번 레슬매니아를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어 한 WWE 관계자들의 바람을 생각할 때 어느 정도 낡고 식상한 베키 린치가 역대 최강으로 보이는 리아 리플리를 이길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고 결과는 예상대로였습니다. 문제는 다음 PLE까지 또는 내년까지 리아 리플리의 경쟁자를 만들어 내는가인데 현재 RAW의 여성 로스터를 생각할 때 브랜드 간 드래프트 이외에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통합 WWE 태그팀 챔피언십
요즘 두 브랜드 모두 태그팀 경쟁이 핫하고 나름 열기를 띠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 자주 경기를 갖지 않는 데미언 프리스트와 핀 벨러가 통합으로 장기 집권하기보다는 브랜드별로 나누어 벨트를 차지하는 경기방식과 결과가 타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썸 트루스의 RAW 타이틀은 일회성 재미를 위한 이벤트이자 두 노장의 인디언 썸머로 오래갈 것 같지는 않고, 드래프트 뒤에 적당한 젊은 레슬러들에게 넘어갈 것 같습니다. Smackdown 쪽은 의외였는데, 그간 다양한 상황에서 맞아주고 당해준 (옛정권의 황태자) 오스틴 씨어리와 그레이슨 월러에 대한 경영진의 보상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어썸-트루스와 달리 이쪽은 <악역> 챔피언도 필요한 WWE 세계관을 생각할 때 현재 악역 챔프가 부족한 상황이라 의외로 오래갈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리 강력해 보이지 않는 이 두 명 정도의 선수가 챔피언이라면 오히려 그 도전자들도 제법 다양하게 구성해 재미있는 경기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레이 미스테리오 + 안드라데 vs 산토스 에스코바르 + 도미닉 미스테리오
미국 내 히스패닉 비율, 히스패닉 국가에서의 레슬링의 인기도를 생각할 때 빠질 수 없는 경기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예정대로 드래건 리가 레이 미스테리오의 파트너로 나왔다면 뭔가 혈통(도미닉)에 의한 계승이 아닌 루차 리브레의 정신과 유산에 의한 계승이라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될 수 있었겠지만, 드래곤 리의 부상으로 다음 기회로 이런 감동은 미루어야 할 것 같고, 그동안 이 감동을 위한 빌드업을 각본진이 어떻게 이끌어 갈지 기대됩니다. 결국 노장 레이 미스테리오는 좀 더 굴러야 할 듯합니다.^^
제이 우소 vs 지미 우소
넓은 의미의 <블러드라인> 끝장내기의 한 과정이자 인기에 비해 뭔가 타이틀 하고 거리가 좀 있는 제이 우소에 대한 향후 새로운 푸시를 위한 중간 마침표적인 경기인데, 아쉽게도 수퍼킥 대잔치 외에 그리 큰 임팩트는 주지 못했습니다.
제이드 카길 + 나오미 + 비앙카 벨레어 vs 데미지 컨트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고 진행도 예상했던 대로인데 임팩트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경기입니다. 대어인 제이드 카길을 어떻게 활용할지 지켜봐야겠습니다. 특히나 무적 기믹이 식상해지는 것은 금방이라.
WWE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십 (군터 vs 새미 제인)
이런저런 빌드업, 군터가 이제는 인터컨티넨탈 타이틀만 들고 다니기에는 좀 아까운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예상된 결과입니다. 향후 인터컨티넨탈 타이틀은 다시 원래대로 뭔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도약의 발판으로 복귀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새미 제인이 군터처럼 장기집권하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코디 로즈 + 세스 롤린스 vs 더 락 + 로만 레인즈
이 경기의 결과가 둘째 날 경기의 룰을 좌우한다는 점, 그리고 이 경기에 로즈-롤린스가 패한 경우 적용될 룰인 <블러드라인 룰>이란 것이 그냥 단순 무식하게 <무엇이든 가능>하다고만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경기의 승패, 둘째 날의 진행까지 예측은 가능했습니다만, 그래도 코디-세스의 승리를 희망하고 지켜봤습니다. 물론 결과는 예상대로. 스토리상 진행된 블러드라인의 행태를 보면 그냥 1 대 1의 정정당당한 대결에서의 승리로 코디가 타이틀을 획득하는 것만으로는 관객의 욕구를 해소할 수는 없으니까요.
레슬매니아 2일 차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세스 롤린스 vs 드류 맥킨타이어)
코디 - 로만의 대결에 세스 롤린스를 끼워 넣고 경기에서 이런저런 상황을 만든 것을 생각하면 거의 핸디캡 매치 상황으로 드류가 승리할 것이 보인 경기였죠. (양일에 걸쳐 첫 경기에서 부부동반 패배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저쪽 챔피언 벨트를 선역이 가져간다면 이쪽도 나름 선역인 세스가 방어해서는 뭔가 스토리 진행이 재미없으니, 그간 악역의 이미지를 쌓아 놓은 드류에게 세스가 타이틀을 잃는 것은 당연해 보였습니다. 아울러 구태여 CM펑크를 중계석에 앉힌 것으로 보면 뭔가 막대한 역할이 주어질 것도 예상은 되었는데, 이걸 데미언 프리스트의 캐싱인과 연결할 줄은 예상 못했습니다. 아마 드류 맥킨타이어의 계약이 끝나가는 것 같은데,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과 차후 스토리 진행을 위한 포석으로 보입니다. 만약 드류가 방출되는 것이 확정이라면 썸머슬램 정도에서 그간 갈등을 키워놓은 CM펑크와 대결을 하고 떠나는 걸로 결론 나지 않을지? 드류 맥킨타이어는 떠나보내기엔 너무나 훌륭한 선수이긴 한데, 카리스마가 좀 부족한 게 아쉽습니다.
필라델피아 스트릿 파이트 매치 (프라이드 vs 파이널 테스타먼트)
몇 번 가봤지만 저는 못 느꼈던 <과격한> 필라델피아 시민을 위한 헌정 경기. 저는 이런 스트리트 파이트 매치 같은 험한 룰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LA 나이트 vs AJ 스타일스
어딘가 딱히 끼워 넣을 수는 없지만,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할 두 명을 위한 경기라고 생각됩니다. 인기로 봤을 때 여기서 마저 LA 나이트가 못 이기면 (그간은 이런저런 핑계를 많이 만들어 주었죠) 향후 인기전선에 영향이 올 수도 있으니 당연히 이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그대로 나왔습니다. 둘 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AJ 스타일스가 더 나이가 많고 누린 것도 많으니 뭐 조금 젊고 이제 늑깍이 스타로 발돋움하는 LA 나이트를 밀어줘야겠죠.
WWE US 챔피언십 (로건 폴 vs 케빈 오웬스 vs 랜디 오턴)
둘 중 하나와 붙으면야 당연히 챔프가 바뀌겠지만, 구태여 트리플 쓰렛 매치로 끼워 넣은 점, 로건 폴의 음료가 WWE의 스폰서가 된 사실상 첫 이벤트란 점에서 어찌 진행될지는 예상된 경기입니다. 문제는 이 정도로 선배들이 밀어주었으니 향후 로건 폴이 파트타이머가 아닌 풀타이머로서 좀 더 경기에 많이 참여하게 될지, 케빈 오웬스와 랜디 오턴의 갈등이 일회성일지 아니면 이걸 좀 더 스토리에 반영할지입니다.
WWE 위민스 챔피언십 (이요 스카이 vs 베일리)
나이 차이는 안 나지만 얼굴로는 현격한 선-후배인 이요와 베일리의 대결은 챔피언이건 뭐건 일본인이 레슬매니아에서는 못 이긴다는 것을 보여준 경기였고, 관객들의 베일리를 응원하는 마음이 반영된 경기였습니다. 그간 은퇴 이야기도 나오는 이오 스카이니만큼 향후 그런 방향이 될지 아니면 뭔가 다른 스토리가 진행될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통합 WWE 유니버셜 챔피언십 (로만 레인즈 vs 코디 로즈)
코디 로즈가 누구보다 먼저 로열 럼블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하고 실제로 2년 연속 우승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 경기가 어떤 룰이건, 어떤 상황이건 (더구나 백혈병을 앓고 있기에 경기에 거의 출전하지 못하는 로만 레인즈임을 생각하면) 코디 로즈가 챔피언이 되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블러드라인 규칙이라는 것이 (저라면 블러드라인에게만 유리하게 정했을 텐데) 꼭 블러드라인에게만 유리하지 않은 <누구나 마음대로> 조항이라는 점도 향후 전개되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죠. 특히 로만 레인즈와 블러드라인의 천하는 단순히 코디 로즈 개인의 꿈을 이루는 수준이 아닌 관객과 선수진이 모두 바라는 <혁명> 그리고 <시대의 전환>이 필요한 상황임을 감안할 때 제이 우소, 세스 롤린스 등의 현역 반-블러드라인파 외에 존 시나, 언더테이커 같은 선배 전설들이 나와 혁명을 함께 이룬다는 의미는 매우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빈스 맥마흔의 압제를 이겨내고 새로운 시대를 이룬 트리플 H시대의 WWE의 시작이라는 현실과 접목되어 더욱 감동적인 순간으로 기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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