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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역사와 음악 (2) 카를로스/카를 5세와 음악 - 한 없는 회한: 황제의 노래

만술[ME] 2025. 5. 27. 17:01

지난 포스팅에서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여왕과 음악에 대한 글을 올린 김에 비슷한 형식의 음반 소개를 계속해볼까 합니다. 오늘은 이사벨 1세가 이룬 스페인 제국의 틀을 신성로마제국을 포함한 거대 제국으로 확장한 카를로스 1세 또는 카를 5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진행하기에 앞서 명칭에 대해 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세, 3세라는 표현이 아들, 손자라는 의미에 국한되어 사용되지만, 서양의 왕의 명칭은 2nd, 3rd에서 볼 수 있듯, 단순히 누구의 아들이나 손자를 의미하지 않고, 왕위 계승의 과정에 나오는 (성이 아닌) 이름의 순서에 대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헨리 아무개의 아들이 리처드이고, 리처드의 아들도 리처드며, 그 리처드의 아들이자 첫 헨리의 증손자가 또 헨리라고 할 때, 왕의 이름은 헨리 1세, 리처드 1세, 리처드 2세, 헨리 2세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즉, 헨리 1세와 헨리 2세는 부자지간이 아닌 증조부-증손자의 관계인 것이죠. 더구나 다양한 친족 간의 통혼으로 왕위 계승권 따먹기를 하는 것이 유럽 왕가의 전통인지라 한 인물이 꼭 한 나라의 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왕을 겸하기도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백작이 되거나, 공작이 되는 일도 있습니다. 이렇기에 카를 5세의 경우, 스페인에서 어머니 후아나의 왕위를 계승받은 왕으로서의 명칭은 카를로스 1세가 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카를 5세가 되는 것이죠. 물론 카를 5세라는 명칭이 더 유명하기에, 소개하는 음반의 제목처럼 스페인에서도 그냥 카를의 스페인 대응 명칭인 카를로스에 5세를 붙여 카를로스 5세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없는 회한 - 황제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이 음반은 앞서 소개한 이사벨 1세에 대한 음반과 같은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카를 5세가 가장 좋아했다는, 그래서 그의 궁정 음악가였던 루이스 데 나르바에스가 비후엘라 독주곡으로 편곡하면서 <황제의 노래>라고 칭한 <Mille regretz>(한 없는 회한)를 중심으로 카를 5세의 삶의 궤적을 따라 다양한 음악을 배치해서 그의 삶의 OST가 될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죠. 이 음반이 이사벨 1세 음반 보다 먼저 발매되었으니, 오히려 이사벨 1세에 대한 음반이 이 음반의 형식을 취했다고 할 수 있지만, 역사의 순서를 생각하면 이 음반을 나중에 듣는 것, 그리고 소개하는 것이 더 알맞은 일이겠지요. 이 음반은 아래의 주요 사건을 기준으로 음악을 담고 있습니다.

 

I

1459    The era of Maximilian I (King of Rome, 1486 and Germanic Emperor, 1493)

            and Mary of Burgundy (Duchess of Burgundy, 1477-1482)

 

우선 음반은 카를 5세의 부계 쪽 혈통의 사건을 먼저 다룹니다. 부르고뉴 공작 샤를의 예기치 못한 전사로 딸인 마리는 부르고뉴 공국의 상속자가 되었지만, 이 기회를 놓칠세라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살리카법을 내세워 적법한 왕위 계승자가 없다는 이유로, 형식상 프랑스왕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사실상은 독립국이었던 부르고뉴 공국의 회수를 주장하며 침공을 해 마리를 억류합니다. 이에 마리의 도움 요청을 받은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막시밀리안 1세는 마리를 구출한 뒤 그녀와 결혼을 하고, 프랑스와의 대결을 통해 부르고뉴 지방을 넘겨주는 대신 알짜배기 저지대 지역을 확보합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 훗날 카를 5세의 아버지가 되는 아들 필리프를 낳습니다. 음반은 <Dit le Bourguygnon> 같은 부르고뉴 기원의 곡으로 카를의 기원을 보여주면서 <Fortuna Desperata: Nasci, Pati, Mori>(절망적인 운명 : 태어나고, 고통받고, 죽는다) 같은 곡으로 그가 겪게 될 많은 사건을 암시합니다.  

 

II

1496    Marriage of Philip I the Handsome to Joanna the Mad

1500    Birth of Charles V

1516    Reign of Charles V

 

한편 모계 쪽의 이야기를 진행하자면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딸인 후아나 공주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이자 어머니 마리의 이른 죽음을 통해 상속한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인 미남공 필리프와 혼인을 합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혈통 덕에 물려받을 영지가 넘쳐나는) 유럽 역사의 최고 금수저라 할 수 있는 카를이 태어납니다. 이사벨 1세 사후 스페인의 정치적 지평은 요동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기나긴 세월을 이사벨 여왕과 함께 통치해 왔던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에 대해서는 이사벨 1세의 남편의 자격으로서 통치를 해왔던 데다가, 카스티야 입장에서는 여전히 그가 아라곤 사람으로 인식되었기에 딸과 사위 조합인 후아나-필리프의 왕위에 대한 요구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1506년 필리프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권이 다시 한번 요동치게 된 것인데, 별칭처럼 광녀(la loca)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남편의 별칭(미남공)처럼 잘생긴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해진 바 후아나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시체를 끌고 순례길을 3년간 지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랑드 샤펠>이라 불렸던, 필리프가 지배했던 부르고뉴의 궁정악단은 당대 최고의 악단으로 손꼽혔는데, 단원들의 명성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실악단이나, 프랑스의 궁정악단을 능가했고, 오직 교황청 성가대 정도만 비등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필리프가 스페인으로 올 때 함께 왔던 이 그랑드 샤펠은 필리프의 사후 후아나의 소유가 되어 그녀가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며 방황하는 동안 곁에서 그녀의 슬픔을 달래주곤 했습니다. 후아나의 광기가 사실인 것인지 아니면 그녀로부터 권력을 찬탈하기 위한 음모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광기 때문에 공동 통치라는 명목으로 처음에는 페르난도 2세가, 나중에는 카를 5세가 실권을 가지고 스페인을 통치하게 됩니다. 

 

1500년 태어난 뒤, 1504년 외할머니 이사벨 1세의 죽음으로 왕위 계승을 위해 어머니 후아나와 아버지 필리프가 떠난 뒤, 저지대에 남겨져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에 의해 철저히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자로서 길러진 카를은 외할아버지인 페르난도 2세에 의해 독살설이 있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정신병 때문에 진작부터 예견되던 금수저 운명이 일찍 발현하게 됩니다. 다만 아직 성년이 되지 못했기에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부르고뉴 공국과 저지대는 마르가레테가 섭정을 합니다. 한편, 딸 후아나를 광기를 이유로 유폐한 뒤, 카를이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아라곤은 물론 카스티야를 포함한 스페인 전역의 왕으로 군림하던 페르난도 2세는 자신의 아이에게 후계를 맡기려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후사를 이을 아이가 없어 결국은 후아나 소생의 외손자 중 첫째인 카를과 동생인 페르난도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합니다. 지역인심이나 본인의 마음이야 스페인에서 자란 페르난도에게 있었겠지만, 명분과 대의라는 측면에서는 카를을 당할 수 없었던지라 결국은 카를에게 스페인의 왕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음악적 소양이 풍부했던 카를은 스페인으로 향하면서 부르고뉴 궁정 샤펠의 적자라 할 수 있는 플랑드르 샤펠을 대동하는데, 이들은 카를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합니다.

 

III

1519    Revolt of the Germanías in Valencia and repression of the Comunidades

1525    Battle of Pavia

1526    Marriage of Charles V to Isabella of Portugal

 

1517년 스페인에 도착할 무렵의 카를은 언어는 물론 문화나 전통에도 익숙지 않은 상황이었고, 앞서 이야기한 대로 스페인에서의 인심은 그곳에서 자란 동생 페르난도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카를이 플랑드르 출신으로 주요 직책을 채워 넣으면서 스페인의 전통이나 관습을 무시한 정책과 스페인과 관련 없는 전쟁에 사용키 위한 세금을 부과하자 납세 거부운동과 함께 꼬뮤네로스의 반란이라 부르는 대규모의 반란을 초래합니다. 1521년이 되어서 이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카를은 절대왕정이라는 새로 대두되는 사상과 전통적인 질서와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두 양단의 적절한 균형을 취하면서 거대 제국을 다스리게 됩니다. 1517년 발발한 반란이 1521년이 되어서야 진압된 데는 1519년 할아버지인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타계하여 계승후보로서 선거전을 벌여야 했던 것이 중요한 이유였는데, 독일의 금융거부인 푸거 가문 등의 막대한 자금지원에 힘입어 마침내 1520년 카를 5세로서 신성 로마제국의 선출된 황제로서 즉위하게 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등극하고 할아버지의 영토까지 물려받음으로써 부르고뉴와 저지대, 스페인과 그 식민지, 독일까지 지배하게 된 카를 5세는 황제 선거의 경쟁자인 프랑수와 1세와의 기나긴 싸움을 시작합니다. 첫 싸움터는 이탈리아였는데, 1521년 발발한 이 전쟁은 1525년 파비아에서 프랑수와 1세를 격파한 뒤, 결국은 프랑스왕을 포로로 잡음으로써 프랑수와 1세 입장에서는 굴욕적인 마드리드 조약을 체결하게 만듭니다. 1526년에는 포르투갈의 이사벨과 결혼을 하는데, 지적이고 아름다웠던 것으로 알려진 그녀와의 결혼은 훗날 필리페 2세가 되는 장남을 비롯하여 6명의 자녀를 둡니다. 그리고 둘의 금슬은 매우 좋아 이사벨 왕비의 사후, 카를 5세는 늘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재혼을 하지 않고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IV

1527    Sack of Rome
1530    Pope Clement VII crowns Charles V Emperor and King of Italy

 

굴욕적으로 강요된 마드리드 조약의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는데, 절치부심한 프랑수와 1세는 영국의 헨리 8세, 새로 선출된 메디치 가문 출신의 클레멘스 7세와 연합하여 반 카를 5세 동맹인 꼬냑 동맹을 결성하는데, 클레멘스 7세 주도의 이 동맹은 로마 약탈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옵니다. 꼬냑 동맹과 대결하기 위해 카를 5세는 용병군을 고용했는데, 부족한 용병료에 불만을 품었던 용병군이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로마로 진격하여 약탈을 행한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그 신성의 상징이자 수도인 로마를 약탈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인데, 막상 용병의 대다수는 프로테스탄트였던지라 가톨릭의 본산지인 로마의 약탈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 로마의 약탈로 카를 5세에 대항할 힘도 의지도 없어진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의해 카를 5세는 153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이탈리아의 왕으로 대관식을 하게 됩니다. 

 

V

1532    Peace Treaty of Nuremberg
1538    Peace Treaty of Nice
1539    Death of Charles V's wife

 

카를 5세는 종교개혁의 흐름에 대해 대단치 않게 생각하고, 자신의 정치적인 권위와 군사적 힘이 독일 내 프로테스탄트 왕들에게 충분한 억제로 작용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를 통한 프로테스탄트를 가톡릭에 흡수 통합하려는 종교 일원화는 루터파가 신앙고백을 제출했음에도 가톨릭 쪽에서 채택을 거부하여 재협의를 거듭한 끝에 파행으로 끝나자 프로테스탄트들은 이제 실력행사 외에 답이 없다는 생각으로 무력충돌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1532년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비인까지 위험하게 되자, 프로테스탄트와의 동맹을 통한 힘을 모으기 위해 뉴른베르크 강화회의를 통한 휴전이 합의됩니다. 한편 1535년 카를 5세의 조카사위인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카를 5세는 자신의 아들인 필리페를 밀라노 공작에 임명하려고 했으나, 밀라노뿐만 아니라 주변 공화국들의 반대로 포기합니다. 이 기회에 카를 5세의 숙적인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가 가만있을 리 없었고, 밀라노공작을 지냈던 이력을 내세운 프랑수아 1세는 1536년 이탈리아를 재침공(제6차 이탈리아 전쟁), 밀라노를 점령하지는 못했음에도 오스만제국과 동맹을 맺고 카를 5세를 위협하자 카를 5세는 휴전을 제안하면서 니스 평화조약을 통해 제6차 이탈리아 전쟁이 종료됩니다. 이듬해 사랑했던 아내 이사벨 왕비는 세상을 떠납니다.

 

VI

1547    Battle of Mühlberg
1556    The Abdication
1557    Retirement at the Monastery of San Jerónimo de Yuste

1558    Death of Charles V

앞서 이야기 한 구-신교 간의 갈등은 오스만의 위협이 물러가자 다시 전쟁으로 격화되고 슈말칼덴 전쟁이라 부르는 이 전쟁에서 카를 5세는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비텐베르크 인근 뮐베르크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최후의 승자가 됩니다. 하지만 음반에서 이 승리를 V번 항목이 아닌 VI번 항목에 묶은 것처럼 이 영광의 정점은 몰락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슈말칼덴 전쟁의 승리로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은 무력화되었고, 유럽 내에 카를 5세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세력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편에 섰던 제후들에게 약속했던 사항들의 이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 기회에 씨를 말려버릴 듯한 종교적 박해가 계속되었으며, 동생 페르난도(페르디난트)에게 물려주기로 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도 아들 필리페에게 물려주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그간의 지지기반이 떨어져 나간 카를 5세는 자신의 의사와 반해서 신-구교 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아야 했고, 결국은 1556년 그가 가지고 있던 다양한 왕위들을 물려주며 퇴위하게 됩니다. 1557년에는 스페인으로 돌아가 유스테 수도원에 마지막 기거를 하면서 이 음반의 표제인 <Mille regretz>를 즐겨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 조용히 세상을 떠납니다.

 

카를 5세는 플랑드르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부터 양질의 음악 교육을 받았고,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플랑드르 샤펠을 늘 대동하고 다녔고, 이들은 그가 임종한 유스테 수도원까지 함께 했습니다. 모랄레스는 이사벨 왕비와의 결혼 음악을 작곡했고, 나르바에스는 조스캥 데 프레의 곡으로 알려진 <Mille regretz>를 비후엘라를 위한 곡으로 편곡해서 황제 곁에서 늘 연주했으며, 황제는 유스테 수도원에서 합창단원들과 함께 노래하곤 했다고 합니다. 카를 5세의 삶이 이러하기에 음악으로 그의 삶의 역정을 함께하는 이 음반은 꽤 의미 있는 시도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