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하이파이맨 HE1000se 평판형 헤드폰
점점 스피커를 통한 음악 감상보다는 헤드폰을 이용한 감상에 치중하게 되어 아예 헤드폰 중심으로 오디오 시스템을 바꾸어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헤드폰을 이용한 음악 감상은 주변의 소음이 문제 될 때는 밀폐형인 포칼 래디언스를 사용하고, 밤에 혼자 음악을 들을 때는 주로 오픈형인 베이어다이내믹의 DT 880을 병행 사용했습니다. 두 헤드폰 모두 큰 불만은 없었지만, 소소한 불만은 있었는데, 래디언스는 밀폐형 특유의 개방적이지 않은 소리의 특성이, DT 880은 조금 떨어지는 해상력과 펀치감이 아쉬웠습니다. 제대로 된 음악 감상은 어쩔 수 없이 야간에 혼자 듣는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할 때 오픈형 헤드폰의 업그레이드에 대한 필요성이 점점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었죠. 포칼의 상위모델인 유토피아 같은 방안도 있었지만, 같은 브랜드, 같은 다이내믹 드라이버 방식의 헤드폰보다는 색다른 헤드폰을 들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대안으로 생각한 게 평판형이었습니다.
평판형 헤드폰으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하이파이맨의 서스바라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끝판왕이고 앞으로 다른 생각 안 할 정도의 제품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죠. 문제는 이 헤드폰이 앰프를 엄청나게 가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헤드폰 가격보다 훨씬 비싼 앰프를, 그것도 골라서 물려주어야 제대로 소리를 내고,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처참한 결과를 내놓는다는 평판이 자자했습니다. 저는 이런 스타일의 장비(스피커/헤드폰)를 좋아하지 않는데, 좋은 소리를 얻기 위해 뭔가 노력을 하고, 장비를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는, 비 오디오파일적인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오디오도 플러그&플레이가 좋고, 그냥 매칭이고 뭐고 없이 돈값을 해야 한다는 입장인 거죠. 한편, 평판형이나 소위 끝판왕 계열의 다른 헤드폰도 있었지만, 무게를 생각하면 하이파이맨 쪽의 헤드폰들이 답인 것 같았습니다.

끝판왕급의 음질에 부담 없는 무게, 대충 지금의 장비에도 실력을 뽑아낼 수 있는 평판형 헤드폰을 고르자니 답은 하나밖에 없더군요. 하이파이맨의 서스바라 이전에 최고등급을 자랑하던 하이파이맨의 HE1000se, 소위 헤천세로 불리는 헤드폰이었습니다. HE1000 계열의 헤드폰도 제법 다양한 모델이 현역으로 나와 있는데, V2버전은 se버전 대비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니 무시하고, 문제는 그냥 se버전이냐 아니면 신형인 언베일드(Unveiled) 버전이냐 중에 고르는 것이었습니다. 원리상 오픈형 헤드폰의 마지막 장애인 뒤판을 완전히 제거하고 개방시킨 언베일드 버전이 더 좋을 수 있겠습니다만, 이 방식은 안전성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너무 나아간 느낌이 들더군요. 보관 시에는 뚜껑을 덮어 보호하지만 음악을 들을 때는 그야말로 드라이버를 완전히 노출해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인데, 오디오 장비는 음악을 듣기 위한 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제 입장에서는 실수로 쉽게 드라이버를 망가뜨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악을 들을 때마다 보호커버를 탈부착해야 한다는 것도 귀찮기도 하고요.
결국 요즘은 가격도 저렴(?)해진 HE1000se로 결정했습니다. 디자인도 서스바라 못지않고, V2나 언베일드 버전에 비해서는 훨씬 멋지고 서스바라에 비해 모바일 환경에서도 구동 가능할 정도로(사용해 본 결과 그렇지는 않습니다) 앰프를 가리지도 않고요. 즉, 끝까지 가지 않아도 거의 끝까지 간 느낌으로 음악을 듣기에는 이 정도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 헤드폰이었습니다.
[패키지 / 디자인]
저는 실용적이지 못한 패키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포칼 래디언스 정도의 패키지도 부담스러운데, HE1000se의 패키지는 더 웅장해서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적당한 종이 박스에 담더라도 편하게 헤드폰과 케이블을 수납해 다닐 수 있는 백을 하나 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중고 매물로 내놓을 일이 없다고는 해도 박스를 버리는 아쉽고, 버리려 해도 분리수거하기도 힘든 상황이라 일단은 처치곤란입니다.
케이블은 고맙게도 3.5mm, 6.35mm 언밸런스 케이블 및 XLR케이블 총 3종을 지원합니다. 물론 저는 전부터 사용하던 Geek 케이블에 물려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다양한 케이블을 제공하는 것은 다양한 사용자의 환경에 맞출 수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만 케이블의 느낌이 한 가격할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드는 스타일입니다.
디자인은 이어컵이 계란형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서스바라와 동일한 모습인데, 제 귀에는 잘 맞습니다. 아마 어지간하면 다 잘 맞을 듯한 크기와 디자인이라 딱히 착용에 대한 이슈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시간 착용하거나 착용한 상태로 리클라이너에 기대도 불편함이 없습니다. 무게도 목에 부담을 주지 않는 정도입니다. 전반적인 디자인이나 재질로 보았을 때 저렴하다기보다는 가격 좀 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디자인으로 마음에 듭니다.
[청취 소감]
첫 음부터 개방되어 있다는 느낌이 확 풍깁니다. 전방 어디서 인가 울려오는 소리로 들리지는 않지만 헤드폰이 아닌 밖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는 느낌입니다. 개방성과 넓은 무대는 상대적으로 높은 볼륨도 편안하게 들을 수 있게 해 줍니다. 35 오옴에 96dB라는 스펙은 앰프에 부담이 없는 스펙이지만, 그렇다고 아무 앰프로나 최선의 능력을 뽑아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600 오옴의 DT 880과 비교해도 더 볼륨을 먹습니다. 따라서 거치형 시스템에서야 별 문제없겠지만, 모바일 환경에서 듣는다면 성능이 좋은 앰프 또는 꼬다리를 사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해상력은 발군입니다. 넓은 무대에서 각각의 소리를 정확한 장소에 겹겹이 뿌려줍니다. 비슷한 대역의 악기 소리도 각각의 소리를 분해해서 들려주고, 그 정위감도 훌륭합니다. HE1000se로 들으면 음악들이 3D 공간에 뿌려져 있는 느낌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게 부자연스럽지 않고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해상력이 좋아서 그간은 그냥 지나갔던 녹음상의 자잘한 실수가 들리는 단점도 있습니다.
전대역에 걸쳐 평탄한 느낌의 소리로 재미있는 경향은 아닙니다. 아울러 음악을 뜨겁거나 따뜻하게 들려주지도 않습니다. 만약 뭔가 진득하고 뜨거운 느낌의 소리를 지향한다면 다른 헤드폰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다만 저는 분석적이고 상대적으로 차가운 음색을 선호하기에 마음에 들었습니다. 엄청난 스피드를 발휘하는 헤드폰이라 작은 소리이건 큰 소리이건 한방 훅 치고 들어와서는 깔끔하게 물러나는 스타일이고 이 점이 제게는 장점으로 들리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정갈하지만 뭔가 묵직함이 없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을 듯합니다. 저역 또한 매우 선명하기에 다른 스타일의 저역을 선호하는 분들이라면 저역이 약한 듯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모든 대역에서 깔끔하고 칼 같은 정확성을 보여줍니다. 해상력과 무대감도 칼 같이 정확하기에 듣기에 따라서는 저역이 약하다거나 소리 경향이 정이 없이 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진하고 묵직한 소리를 선호하는 분들이라면 조금 해상력이 낮아도 다른 헤드폰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음원에서 모든 것을 뽑아 드넓은 공간 속에 정확한 위치에 정확한 소리를 뿌려주는 헤드폰을 원한다면, HE1000se는 최선의 선택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