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웨스트월드 시즌 1 (HBO)
지금처럼 영화가 넘쳐나지 않던 시절인 80년대에는 TV에서 해주는 외화 프로그램이 주요한 영화 공급처였고, 그 한 편 한 편이 소중했던 터라 아무리 허섭한 영화라도 요즘처럼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감상>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시절 TV를 통해 보았던 인상적인 영화들이 제법 되는데, 율 브리너 주연의 <웨스트월드>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소설(로 먼저 읽은) <쥬라기 공원>의 작가인 마이클 크라이튼이 <웨스트월드>는 물론 이시절 인상 깊게 보았던 <안드로메다 스트레인>의 원작자이기도 하다는 점은 흥미로웠습니다. 세 작품 다 과학과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모든 일이 발생하지도 않은 듯 묻어버리는 결말을 택한 점은 아쉽지만, 설정이나 모티브는 제법 흥미로운 작품이기에 지금도 유사한 작품이 나오고, 리메이크되는 것이겠지요.
OTT를 즐겨보는 연령층에서 영화 <웨스트월드>를 실제로 보거나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임을 감안하면 기존 영화와 HBO의 드라마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 없을 듯하여, 이번 글은 드라마 <웨스트월드>만 다루고자 합니다. 그리고 시즌 1을 끝낸 뒤에 시즌 2를 봐야 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하기에 시즌 1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평을 보니 다른 시즌은 몰라도 시즌 1에 대해서는 호평이 많고, 좋아하는 분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아래에서 이런저런 불만을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저도 시즌을 보는 내내 즐겼다는 점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돌로레스와 윌리엄 이야기의 과거와 현재의 교차편집, 아널드와 버나드 이야기의 교차편집을 통해 교묘하게 충격적인 진실로 유도하는 편집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자 강점입니다.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말이 안 되는 연출이라 생각하며 보았던 부분들이 두 이야기의 진실이 드러나면서 사실은 복선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감탄했습니다. 마지막 이전에 윌리엄이나 버나드의 정체를 깨닫기는 했지만, 반전이 있으리라는 정보도 없었기에 극이 상당 부분 진행될 때까지는 전혀 짐작도 못했기에 더 감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다른 한축인 메이브-펠릭스의 이야기는 (다음 시즌에서 뭔가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덧붙여질지는 몰라도) 전혀 설득력이 없이 진행됩니다. 메이브야 마지막화에서 사실은 코딩이 되어있는 대로 일을 수행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지니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다고 해도 펠릭스와 그 친구인 실베스터 모두 행동이 대책이 없습니다. 이중에 최악은 펠릭스인데 호스트들의 실체를 매일 보면서 그 피부 속을 헤집는 것이 직업인 그가 호스트에 인간적인 연민이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시즌 내내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하고 배우도 상황에 적웅 못하고 순응하는 표정을 짓는 것 이외에 무엇인가를 연기로 표현하지 못해서 제게는 가장 비호감인 캐릭터입니다.
본격적으로 Chat-GPT가 등장하기 이전에 시작한 드라마지만 그럴듯한 대사들에도 불구하고 AI에 대한 깊은 고민은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로버트 포드나 아널드 웨버 등의 등장인물들이 그럴듯한 대사를 읊조려도 그냥 철학자연하는 겉멋으로만 보입니다. 영화 <매트릭스 2>에서 뭔가 있어 보이려 나온 설정들을 접했을 때와 유사한 느낌입니다. 줄거리와 사건의 진행이 흔한 양산형 SF의 클리셰를 반복하기에 주인공들이 "제가 아이였을 때부터, 저는 좋은 이야기를 사랑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가 더욱 고귀해지도록 도와, 자신의 결점을 바로잡고 우리가 꿈꾸던 존재가 되게 해 준다고 믿습니다. 더 깊은 진실을 깨닫는 것 말이죠. 저는 제가 그 위대한 전통에 조금이나마 참여할 수 있다고 믿었고, 제 고통의 결과로 이곳을 얻었습니다. 우리 죄악의 감옥 말이죠. 왜냐하면 당신들은 바뀌길 원치 않았기에, 혹은 바뀔 수가 없기에. 결국엔 인간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당신들 대신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이를 찾았습니다. 바뀔 수 있는 누군가를요. 그래서 저는 그들을 위해 새로운 이야기를 썼습니다." 같은 대사를 읊조려도 그리 공감이 되지 않습니다.
시즌 1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에, 그리고 그 후 흔한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수없이 많이 보았던 미친 과학자가 한방에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진부한 이야기의 반복임이 아쉽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 곁들여진 돌로레스와 윌리엄의 이야기 덕에 전반적으로 흥미롭기는 했지만, 이런 미친 과학자 클리셰는 팀 쿡이 (생전에 뭔가 심사가 뒤틀려) 스티브 잡스 사후에 남몰래 혼자 꾸준히 음모를 진행하다 어느 날 한순간에 애플을 파산 나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만큼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드라마 속 세상이란 게 본부장이나 실장이 계약직 직원과 불륜이 아니라 (사실 요즘 사회 분위기라면 사내에서는 불륜조차 쉽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엮일 수 있는 곳이기는 해도 이제 전지전능한 미친 과학자 이야기는 SF에서 그만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원자폭탄 하나 만들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개고생을 했는지 생각해 보세요.
사소한 이야기로 넘어가서 테마공원이 입장료를 얼마나 받는지 몰라도 운영이 가능할지 의심스럽습니다. 내부 이동에 기차로도 한참 걸리는 것으로 짐작되는 엄청난 면적에, 연구/관리 시설만 해도 탁상지를 이용해 공사비를 줄였다고는 해도 지하 80층이 넘어가는 것을 생각하면 조성비용이 대단했을 것으로 생각되어, 미래가 저금리 시대라 할지라도 투자대비 수익이 나올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사실 특정 호스트 모델을 여럿 만들어 돌려가며 소모품처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호스트를 재활용하는데, 그 엄청난 지하공간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새 시나리오가 나와도 호스트를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으니, 딱히 신모델 개발에 중점을 둘 것 같지도 않아 연구실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뭐 대부분이 직원 숙소나 생활공간일 듯합니다. 더구나 그 넓은 공원을 관리자들은 엄청난 깊이에서 지하로 이동하니 터널을 뚫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드라마에 나오는 수준의 인공지능 로봇이 있다면 테마파크를 만들 것이 아니라 무기를 만들거나 기업과 가정에 노동자/노예로 팔아야죠. 뭐 웨스트월드는 그냥 일종의 홍보관으로 적자를 기록하는 대신 실제 수입은 로봇 판매에 있다는 드라마 외적인 설정이 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웨스트월드만으로는 하루 입장에 몇억을 받아도 수익을 내기 힘들 듯합니다. 더구나 원작 영화처럼 미국의 서부개척시대 말고 다른 시공간의 테마공원이 있다면(드라마에서 최소한 센고쿠 시대 정도는 있거나 준비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면적이나 관리비용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관리 시스템도 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호스트가 하루단위로 리셋되는데, MMORPG 조차 위상변경 등을 통해 내가 이루어낸 변화가 게임의 세계에 반영되는 마당에 장기 투숙객이라면 이런 시스템은 최악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객이 처음 도착하는 스위트워터 마을의 캐릭터들은 매일 부활하고 같은 일을 반복하는데, 그 마을에 며칠 묵으면 어제 죽인 보안관이 오늘도 나와 총을 겨누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비싼 돈 내고 체험하기에는 별로 현실감 없는 놀이동산으로 보입니다. 그냥 게임에서 확장판을 내놓듯, 시즌제로 운영하면서 주기적으로 셧 다운과 새로운 시나리오 업데이트를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운영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호스트의 인간에 대한 폭력성의 한계가 불명확합니다. 드라마가 이 부분에 대한 제대로 된 설정 없이 진행되는 느낌이 강해서 어떤 장면에는 사건의 진행에 설득력이 떨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위험성에 레벨이 있어 출발지인 스위트워터 마을의 경우에는 어지간하면 인간이 호스트에 의해 위해를 당하지는 않는 것 같고, 험지로 나갈수록 폭력성의 정도가 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외곽에서 목숨을 위협하지 않는 정도의 신체적 폭력은 가능한 것 같습니다. 다만 총기 사용의 경우, 어떤 원리로 호스트가 쏜 총이 고객의 안전을 보장하는지가 불명확합니다. 왜냐하면 호스트 간의 총격으로 호스트가 죽을 수 있는데, 게스트는 죽지 말아야 하니 뭔가 메커니즘이 필요합니다. 호스트 피부가 종이장도 아니고, 사람과 성교가 가능한 점을 미루어 사람과 유사한 정도의 강도를 가진다 했을 때 총알이 사람에게는 살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호스트에게는 살상력을 발휘하는 메커니즘을 구현해야 하니 참으로 어렵다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가능성은 총기마다 AI나 검출 시스템이 있어서 발사 시 궤적에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실시간으로 탄환의 속도를 조절해 충격을 감소시키는 원리일 수 있습니다. 다만 작중에서 니트로글리세린까지 등장하니 웨스트월드의 안전 불감증은 좀 심하기는 합니다.
시즌 1의 결말로 미루어 시즌 2가 어떻게 진행될지 짐작이 가기는 합니다. 잠깐 쉬었다가 보게 될지, 내친김에 계속 보게 될지, 아니면 그냥 다른 드라마를 볼 지 모르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후 시즌에 대한 글을 올릴 일은 없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