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첫 음반, 첫 사랑 (5) - 빌헬름 켐프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비창>, <월광>, <열정> (DG)
80년대, 그리고 아마 그 이후에도 누군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음반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그의 32개의 소나타 중에 가장 사랑받고 유명한 세 개의 소나타인 <비창>, <월광>, <열정>을 한 장에 담고 구하기도 쉬운 빌헬름 켐프의 스테레오 녹음 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없었을 겁니다. 저 역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켐프의 두 번째 녹음(DG)으로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켐프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두 번의 LP 사이클로 녹음했습니다 (모노와 스테레오). 또한, 셸락(78회전 음반) 시절의 녹음도 있지만 32개 소나타 전곡을 녹음하지는 않았습니다.
피아니스트에 대해 잘 모르던 초창기에 베토벤 - 빌헬름 켐프는 모르는 사람도 혹할 만큼 잘 어울렸습니다. 우선 전형적인 독일 이름인 빌헬름(Wilhelm)부터가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느끼기에도 베토벤을 잘 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합니다. W를 독일 식으로 <ㅂ>으로 읽는다는 것도 독일스러운 멋이 나는 데다 성(姓)인 켐프 조차도 Kempff로 한국인에게는 취약한 발음인 p와 f가 섞여 있어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데다 f는 두 개나 연속으로 붙어 007이 더블 O 세븐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거나 제프 재럿(Jeff Jarrett)이 "J-E-Double-F, J-A-Double-R, E-Double-T!"라고 본인을 소개할 때 느껴지는 독특한 자부심과 멋을 이름에서 풍기고 있죠. 음반 표지는 피아노 앞에 앉은 켐프의 옆모습을 담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나는 독일의 피아니스트야!"라고 말하는 듯하고, 그 자체로 독일을 상징하는 DG(도이체 그라모폰)의 노란 딱지가 커다랗게 상단을 장식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독일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음반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베토벤과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같은 폰트, 같은 크기로 박아 넣어 빌헬름 켐프를 베토벤과 동격인 중요한 사람으로 승격하는 교묘한 디자인적 전략과 함께 Sonatas가 아닌 독일어 Sonaten으로 표기함으로써 더욱 독일 향취를 음반표지에서부터 풍깁니다. 이런 음반에 담긴 베토벤 연주는 누가 봐도 정통파 독일 연주일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며, 연주의 수준이 높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겠지요.^^
이후에 수많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음반들이 나왔고, 그중에 켐프의 음반 보다 더 추천할만한 음반들도 많습니다. 한 장의 음반에 베토벤 소나타를 골라 담는다고 했을 때, <비창>, <월광>, <열정>을 한꺼번에 담는 것보다 더 베토벤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구성도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들어본 켐프의 베토벤은 여전히 모난데 없이 유연하며, 물 흐르듯 노래하고 있어 듣는 내내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습니다. 그의 연주 상당수 그렇듯 조금 심심하고 뭔가 양념이 빠진 듯한 느낌인 것은 여전하지만, 듣다 보면 깊은 맛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부 평론가들에서는 빌헬름 켐프의 연주는 무대보다는 DG의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DG라는 레이블의 힘이 그 영광에 있어 큰 역할을 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지금도 이런저런 글에서 그 시절 베토벤 피아니스트의 양대산맥으로 켐프와 함께 꼽히는 또 다른 <빌헬름>인 박하우스가 Decca에서 녹음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박하우스는 상대적으로 무대에서도 강력함을 보여주는 피아니스트였음을 생각하면, 켐프가 오스트로-저먼 계열의 피아니스트가 필요했던 DG의 궁여지책이었다는 이런 평가가 완전히 잘못되었다고만은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LP시절이나 CD 초창기에는 켐프의 실황연주를 구할 수도 없었고 조금 더 시간이 흘러 90년대쯤 되면 베토벤 연주에 있어 켐프나 박하우스 말고도 대안이 넘치던 시대로 접어듭니다. 당시 켐프의 실황을 접했던 해외 평론가들의 증언에 의하면 켐프의 실황에서의 연주는 좀 기복이 심했던 것 같아서 DG에 의해 만들어진 명성이라는 일부 의견이 왜 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에 BBC Legend 등의 시리즈를 통해 들을 수 있게 된 그의 실황연주 녹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켐프의 연주는 스튜디오 녹음의 노래하는 듯한 아름다운 터치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섬세한 페달링과 절제된 다이내믹 속에서 뜨거운 열정이 그 사이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그가 DG라는 거대한 스튜디오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만은 아니었음을, 그 시절 우리가 들었던 켐프의 베토벤은 진짜였음을, 그리고 만약 실황에서 들을 수 있었다면 스튜디오 보다 훨씬 더 멋진 음악을 들을 수도 있었음을 확인하게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