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양자역학의 역사 (데이비드 카이저 / 동아시아)
책을 고를 때 책 제목이나 광고, 책 뒤표지나 날개만 보고 흥미를 느껴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종종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어서 더 좋았거나 약간 실망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다 번역제목이 아닌 원제를 보면서 "아하!" 하는 경우도 있는데, 데이비드 카이저의 <양자역학의 역사>가 그런 경우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Quantum Legacies>인데, 번역 제목이 양자역학의 역사를 플랑크 시대부터 현재까지 연대기적인 흐름과 그 주요 내용을 서술할 것으로 기대되게 만드는 반면, 책의 실제 내용은 양자역학의 등장 이후 현대물리학의 중요한 순간들의 스냅숏 18장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과 함께 풀어낸 묶음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중요 순간이나 이론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극히 제한적이고 과학사 및 과학사회학적인 접근이 더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제5장 <물리학자의 전쟁: 칠판에서 폭탄으로> 같은 내용이 양자역학의 이론적인 흐름과는 전혀 무관한 내용 중의 하나인데, 이 장은 물리학 교육의 내용과 시스템이 외부 정치, 사회적 여건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 시기와 냉전기 세상을 구하는 슈퍼 히어로였던 물리학자들이 예산 잡아먹는 하마 취급을 받으며 닥치고 계산에 집중하는 모습에서 철학적 함의를 추구하게 되는 배경과 과정 등이 흥미롭게 담겨있습니다.
과학철학, 과학사, 과학사회학이라는 3종 세트에 심취했던 학부 3~4학년과 그 이후의 물리학 복수전공이라는 개인사의 역정을 생각하면 이 책에서 다루어진 많은 순간들이 때로는 지나간 이야기로서, 때로는 (한국의 물리학과 학부생이라는 한계로 인한) 뒤늦은 시간차 현실로서, 때로는 동시대의 현실로서 펼쳐지는 것을 경험했던 터라 꼭지마다 뭔가 감회를 새롭게 하고는 했습니다. 그중 특히나 흥미로웠던 장은 최신 물리학 서적에서 읽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본 적도 없었던지라 80년대 중반에 시간차 현실로 이 책을 받아들였는데, 이공계열은 물론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학부생들이 이 책을 읽고 양자역학과 동양철학을 이야기하며 가끔은 나가서 독재타도를 외치던 흥미로운 시절이었습니다. 이 책은 물론 게어리 주처브의 <춤추는 물리>( Dancing Wu Li Masters)도 아직 번역본이 절판되지 않고 잘 팔리고 있으니 누군가에게는 지금까지 양자역학의 동양철학적 함의는 시간차 현실이나 동시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양자역학의 개념을 터득하거나, 심도 있는 공부 또는 난해한 수학식의 현실 세계로의 형태 변환적 전이를 통한 함의 같은 정보를 원하신다면 이 책 말고 다른 책을 찾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양자역학의 역사>는 양자역학의 해설서도 아니고 발전과정에 대한 통사론적 접근도 아니니 과학사 서적으로서도 적절치 않습니다. 오히려 이 책은 책에서 다루는 18가지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배경이나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는, 유명한 과학자들이 등장인물인 생생한 취재기사 모음집의 느낌으로 받아들이신다면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