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 예술 - 공연

[음악]첫 음반, 첫 사랑 (3) - 베르디 <오텔로> (존 바비롤리 / EMI)

만술[ME] 2025. 3. 21. 18:00

오래전에 다른 글을 통해 제가 클래식 음악을 듣게 된 사연에 대해서는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당시 제가 본격적으로 부모님의 지원으로 음반을 모으기 시작하기 전부터 집에 몇 종의 음반이 있었는데, 부모님이 들으시던 가요와 더불어 몇몇 클래식 / 재즈 원반이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먼저 제 눈길을 끌었던 것이 존 바비롤리가 지휘한 베르디의 오페라 <오텔로> 전곡 음반이었는데, 오텔로로 분한 매크라켄을 등장시킨 표지도 인상적이었지만 오페라 전곡반 특유의 럭셔리한 포장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풀슬립 케이스 형태로 되어 내부에는 LP와 함께 책자가 들어 있고, 책자에는 출연진이나 프로덕션의 사진도 들어 있어서 이런 음반을 처음 접하는 제게는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여기서 잠깐! :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Othello>이고 우리말로는 <오셀로>라고 표기합니다만, 베르디의 오페라 제목은 <Otello>이고 따라서 <오텔로>로 표기합니다.]

 

 

 

타이틀-롤은 제임스 매크라켄이 부르고 데스데모나는 귀네스 존스가 불렀는데, 당시 제가 이름을 알던 극소수의 성악가 중의 하나인 피셔-디스카우가 이아고를 부른 것도 이 음반에 대한 신뢰를 가중했었습니다. 지금이야 베르디 바리톤으로서의 피셔-디스카우라고 한다면 갸우뚱할 수밖에 없겠지만,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던 초창기의 제게는 그 이름만으로도 신뢰의 아이콘이었죠. 요즘이야 구글링을 하면 금방 출연진이나 지휘자에 대한 정보를 훤히 알 수 있지만, 당시야 음반사에서 제공하는 내지 해설 외에 딱히 정보를 얻을 곳이 없었기에 앞에 <Sir>가 붙은 바비롤리에 대해서도 대단한 지휘자겠거니 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바비롤리 경은 현재도 제가 좋아하는 지휘자 중 하나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음반은 EMI가 아닌 Angel 음반인데, 아마도 유럽 보다는 미국을 통해 음반이 들어오는 경로가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당시야 EMI라는 이름도 대충 알고 있을 뿐이고 Angel은 생소했을 뿐 아니라 전혀 별개의 레이블이라 생각하고 있었던지라 특별히 불만이나 다른 감정은 없었고, 보기에도 럭셔리한 음반을 <원판>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었습니다. 나중에 일본 서적을 많이 참고한 레코드 가이드 등에서도 Angel 음반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보면 일본 쪽도 EMI/Angel에 대한 상황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당시에 성음의 라이선스 음반 중에는 오페라는 발췌 음반 외에 전곡음반은 없었던 것 같고 (있어도 사실상 구할 수 없을 정도의 소수였을 겁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중 <오텔로>는 상대적으로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 리골레토 등에 비해) 비인기 오페라인지라 발췌 음반도 (나왔었는지도 모르겠고) 구하기 힘들던 시절인데 제 생애 첫 오페라 전곡 감상을 <오텔로>로, 그것도 원판으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뭔가 선민의식을 자극해 초보자에게 상대적으로  어려운 <오텔로>라는 오페라를 좋아하게 만들었습니다. 더구나 가곡이나 아리아를 좋아하신 어머님 덕분에 베르디라는 이름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만큼 제게 친숙했었고, 셰익스피어 원작의 작품이라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아우라가 느껴졌던 것도 제가 <오텔로> 음반을 각별하게 생각했던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오페라에서 제가 가장 좋아했던 장면들은 1막에서 이아고의 꾐에 빠져 술에 취한 카시오가 난동을 부리는 장면과 마지막에 오텔로가 죽어가면서 데스데모나에게 연달아 키스를 하는 장면입니다.

 

"Un bacio...un bacio ancora...ah!...un altro bacio..."  

 

요즘이야 <불멸의 오페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 외에는 별도로 음반으로 오페라를 전곡 감상하는 일이 많이 줄었고, 막상 <오텔로>를 음반으로 전곡 감상하려 마음을 먹어도 토스카니니/비나이의 음반이나 정명훈/도밍고의 음반을 택하겠지만, 이 음반에도 몇몇 미덕은 남아 있습니다. 이 음반의 녹음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에는 EMI에서 발매된 바비롤리 지휘의 <라보엠>의 대성공, 매크라켄의 메트에서의 <오텔로> 공연의 연이은 성공, 그리고 64년 당대 최고의 오텔로를 구가하던 마리오 델 모나코를 대신해서 매크라켄이 코벤트가든에서 성공적으로 <오텔로>를 불러 갈채를 받았던 사건 등이 있습니다. EMI입장에서는 이 <오텔로> 기획은 <라보엠>을 히트시킨 검증된 지휘자와 메트에서 오텔로 역할로 성공을 구가하고 있는 가수의 조합에 자국 내에서의 화재성까지 가미된 성공 공식이 맞춰진 시도였던 것이죠. 하지만 발매 시의 비평이나 흥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다른 음반들에 밀려 애호가들의 수집 아이템의 순위에 들지 못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CD로 발매도 늦어져 2006년이나 되어야 나왔고, 더구나 처음부터 염가판 시리즈로 발매되었습니다.

 

정성 없이 대충 만든 듯한 CD 버전 표지

 

다시 들어보는 바비롤리 / 매크라켄의 <오텔로>는 <스튜디오> 레코딩이라는 한계를 보이는 점이 아쉽습니다. 가수들도 평균이상으로 훌륭하고 지휘도 좋습니다만 극적인 긴장감이나 음악을 <사건>으로 만들어주는 힘이 느껴지지 않아요. 아마도 발매 시에 많은 사람들이 좀 실망했던 것도 이런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어린 시절의 추억 삼아 듣기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소위 웰-메이드를 넘어서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매크라켄은 영웅적이고, 존스는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피셔-디스카우는 교활한 악당을 멋지게 노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