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시민권의 이론 - 동 시대 민주정들에서 다원성을 조직하기 (판 휜스테런 지음 / 그린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점령당한 네덜란드의 공무원이라는 극단적 사례에서 [중략] 종전 후 수많은 공무원들이 외세 치하에서 공무원으로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법정과 조사위원회에 출두했다. [중략] 많은 경우 그들은 형법을 어기지 않았고,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해당 직책을 규정하는 명시적 규칙을 위반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쟁 중 그들의 처신은 잘못으로 치부되었고, 징계와 강등, 해고 처분이 그들에게 내려졌다. 무슨 근거로 이렇게 한 것일까? [중략] 공무원들은 특수한 상황, 곧 외세 점령 및 통치 하 공무원이라는 상황에 처한 시민에게 요구된 바를 저버린 시민이라는 자격으로 책임을 진 것이었다. 운명은 그들을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었는데, 이 상황에서 그들은 시민들 사이에 존재하던 운명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을 하지 못했다. 유죄가 인정된 공무원 다수에게 그런 선고가 내려진 것은 특정 부역자 조직에 소속되어 있었다거나 외세 권력에 봉사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시민들의 '방패와 칼'로서 적절하게 행위하는 데 실패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판사들의 주장인즉, 공무원들은 독일 당국에 맞서 시민들을 더 실효적으로 보호했어야 했다. 법원이 거론한 공무원들의 또 다른 잘못은, 나쁜 본보기를 보여 시민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 것이었다. 점령자들에게 부역함으로써 공무원들은, 이런 처신이 옳은 것이고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인상을 만들어 냈다. 공무원들은 모범시민으로 행위하는 데 실패한 셈이다. (시민권의 이론 133~134쪽)
시민권에 대한 이론서인 판 휜스테런의 책을 소개함에 있어 극히 학술적인 정치 이론서인 이 책에 대해 일반 독자가 읽어보라거나 필독서라고 소개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책에서 다룬 내용 중 시사점이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제 의견을 가미하는 방식으로 소개드릴까 합니다.
직(職)으로서의 시민권
우리말로 <시민권>으로 번역되는 Citizenship은 단순한 권리로 해석할 문제가 아닌 시민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갖는 지위이며, 따라서 권리와 이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을 수반하며, 실천성이라는 과정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휜스테런은 이 책에서 시민권의 개념을 공화정이라는 제도 안에서의 공적인 직책의 개념이라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특히나 이 시민권을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닌 실천의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시민사회라면 정치적 과정에서 이 시민들이 자신의 직책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장하고, 시민들도 이 직책의 수행을 회피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합의라는 미신과 다원성
시민권과 관련하여 이 책에서 중요한 개념이 다원성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치세 기간 중 그토록 강조한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가 통치자 혼자나 일부 통치자의 의견을 따르는 자들의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고 국민 개인들의 자유를 의미한다면 자유의 개념은 당연하게 다원성의 발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과 다를 수 있는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운운하는 것은 언어도단인 것이죠. 즉, 자유민주정에서 다원성은 개인적인 찬반을 넘어 원칙적으로 정당합니다. 그리고 이 다원성은 귀찮거나 거부하거나 처단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건강하다는 긍정적인 징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원성과 민주주의의 절차를 생각한다면 합의가 민주주의의 조건이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며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생각입니다. 민주주의는 합의를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만 그 합의를 전제로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합의>는 각자의 의견의 일치와 동의를 상정하는 데, 실제 민주주의의 과정이나 시민권의 실천과정에서 이를 추구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전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헌법과 법률로 <부합>의 조건들을 정해놓고 있는 것입니다. 즉,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은 국민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합의를 통해 선출한 것이 아니라 그가 다수의 득표를 통해 법률적으로 대통령의 선출에 부합했기 때문이고, 만약 이 과정에 합의가 있다면 그런 부합한 자는 반대쪽에 투표를 했어도 대통령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묵시적/명시적 합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대통령의 탄핵 절차나 헌법재판관의 임명 또한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 아닌 법과 절차에 부합하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민주적인 법은 자발적이지 않은 합의를 강제하는 경우는 없으며, 어떤 일의 진행에 있어 합의를 기본 조건으로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시민권의 개념과 민주주의의 다원성을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민주주의와 법치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현실은 우리가 다시한번 민주사회에서 직(職)으로서의 시민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